11월의 역사

1997년 11월 21일 대한민국이 IMF의 구제금융을 신청하다

"시청자 여러분, 정부가 결국 국제 통화기금 IMF의 구제 금융을 신청하기로 했습니다. 경제 우등생 한국의 신화를 뒤로 한 채 사실상의 국가 부도를 인정하고 국제기관의 품안에서 희생을 도모해야 하는 뼈아픈 처지가 되었습니다." (MBC 뉴스 앵커멘트 중) 1997년 11월은 우리 국민에게 잊지못할 아픈 역사로 남아있다.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면서 외환 보유액이 급감했고, IMF에서 195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아 간신히 국가 부도 사태를 면했던 사건이다. 동남 아시아의 연쇄적 외환위기속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외환관리 정책의 미숙과 실패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고, 이로 인해 온 국민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대한민국은 2001년 IMF 구제금융195억 달러를 조기상환하면서 IMF 관리체제를 종료시켰다.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 도착한 광주발 통학열차에서 일어났던 일이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일본인 중학생들은 광주 여자보통학교 여학생 세명, 박기옥, 성금자, 이광춘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을 하였고 이 광경을 본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는 분노하여 항의했으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난투극으로 이어졌다. 일본인 학생 50여 명과 한국인 학생 30여 명이 맞붙는 와중에 일본 경찰들은 일본인 학생 편을 들었다. 한국인 학생들은 집단 항의했고 한국인 학생들의 울분을 이를 계기로 폭발게 됬다. 11월 3일은 일본의 메이지 천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치절이었지만 음력으로 10월 3일 즉 개천절이기도 했다. 학생들은 일본 국가를 불러야함에도 침묵했고 하교길에서부터 단체행동에 나섰다. 전에 있었던 충돌을 불공정하게 보도한 광주일보를 찾아가 항의를 하고 가두 시위를 시작하였다. 광주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적을 물리치자는 내용의 행진가를 불렀다. 일제는 항의시위를 가담한 70여 명의 한국인 학생 중 60여 명을 구속하였다. 첫 번째 그들의 시위는 이렇게 끝났지만 일제의 탄압은 오히려 학생들의 저항정신에 불을 집혔다. 11월 12일에는 1000장의 유인물이 배포되었고 광주보고는 물론 광주농고, 광주여 자고등보통학교 여학생들도 가담하여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동맹 휴학까지 포함된 시위였다. 일제는 250여 명에 가까운 학생들을 검거했고 학생 시위에 배후에 있다고 지목된 사회운동 단체 간부들도 검거했다. 광주학생 항일운동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전국적 항일 운동의 단초가 되었다.

1970년 11월 13일 노동운동가 '전태일' 분신하다

뜨거웠던 청년 노동자 전태일.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부당한 대우와 형편은 타성이란 이름으로 세월을 흐르게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반복되는 문제의 익숙함속에서도 매해 11월이되면 삶은 평등한 가치와 인간의 정당한 권리를 갖춰야 한다던 어느 죽음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특히 계약직과 청년 실업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지금, 다시한번 전태일 청년 노동자의 숭고한 죽음이 이야기 되고 있다. 당시 전태일은 겨우 12-13세의 어린 나이의 여공들이 하루종일 굶은 채 열네시간 이상을 일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과 어린 노동자들이 하나에서 열까지 근로 기준법에 어긋난 대우를 받고 있음에 매일을 분노할 수 밖에 없었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분신, 불꽃과 함께 쓰러졌다. 전태일의 죽음은 최소한의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하여 사회적으로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들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에 나서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3년 11월 28일 테헤란 회담

1943년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회담이 열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무렵 연합군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가 모인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 영국의 수상 처칠, 소련의 수상 스탈린이 모인 첫회담이었다. 테헤란회담의 의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연합국 상륙작전에 대한 것이었다. 스탈린이 주장하는 북프랑스 상륙작전과 처칠이 주장하는 지중해작전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고 결국 북프랑스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했다. 총사령관으로는 아이젠하워가 임명되었다. 이 외에도 이란의 독립과 주권의 보전, 소련의 대일전 참가 등이 결정되었다. 이 회담으로 3국의 전쟁 수행협력이 한층 강화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정세에 대해서 그려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테헤란 회담의 이전에는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 총통의 세 연합국 수뇌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모여서 회의를 했고 이런 결과가 카이로 선언으로 이어졌다.

1963년 11월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다.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대통령과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 여사가 텍사스 주 달라스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던 중 울린 세 발의 총성. 첫 발은 대통령의 등, 두번째는 머리를 향했고, 이날 오후 1시 캐네디 대통령은 사망했다. 미국은 전례가 없는 추모 열기에 휩싸였고, 11월 25일 워싱턴 근교 앨링턴 국립묘지에서 장례식을 치뤘다. 존 F. 케네디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기반이 다져진 미국 상류층 집안에서 성장했고, 하버드 대학교 졸업, 미국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30세에 미국 하원에 진출했다. 잘생긴 외모와 수려한 말솜씨, 젊은 패기와 대중적 인기로 상원의원을 거쳐 44세에 미국 35대 대통령에 당선, 미국 역사상 대통령 선거를 통해 당선된 최연소 대통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