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역사

1922년 4월 3일 스탈린,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서기장이 되다.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서기장이 되면서 권력의 정점에 선 스탈린은 본래 눈에 띄는 인물이 아니었다. 특히 러시아 혁명기에 그는 특별한 활약을 보여준 것이 없었다. 물론 이시기에도 그가 강한 권력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많은 사학자들의 증언이지만 막상 눈에 띄는 지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후에 실각을 하고 마는 트로츠키가 혁명을 주도한 인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결국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사실 당시의 최고지휘자는 누가 뭐래도 레닌이었지만 그는 1919년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었고 민족문제위원으로 업무를 제대로 처리했고 소수민족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을 포섭한 스탈린은 어렵지 않게 서기장직을 맡게 되었다. 서기장직을 맡을 때에 그에 대한 평가는 조용하고 겸손한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영웅주의적이고 거만했던 트로츠키에 비하여 온화하고 친화력이 있는 인물이 공산당을 이끌어야한다는 공감대가 있었고 이는 스탈린이 서기장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권력의 정점에 오른 스탈린은 이후에 잔인하고 흉포한 면모를 드러낸다. 그는 트로츠키를 비롯한 자신의 정적들을 잔인하게 숙청하였다. 혁명과정에서 자신과 의견 대립을 보인 사람들 또한 모두 처형해버렸다. 이렇게 대숙청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밉보이는 인간은 모두 ‘트로츠키주의자’ 라는 딱지를 붙여서 사형에 처해버렸다.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들도 학살하는 등 폭력적인 독재자의 전형을 보여주다가 1953년 사망했다.

1992년 미국에서 로스앤젤레스 폭동이 일어나다.

미국 LA 에서 4월29일부터 5월4일까지 인종차별에 격분한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국 LA 경찰청 경찰관이 운전수인 로드니 킹을 구타한 사건과 한인 상점에서 흑인 소녀에게 총격을 가한 사건에서 무죄가 판결나면서, 흑인들의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로 시작되었다. 수천명의 흑인들은 LA에서 시위를 일으켰고, 유혈과 방화로 확산되면서 재산피해액만 약 10억달러를 넘었고, 53명 사망, 수천명이 부상당하는 등 역사상 최대 규모의 무장폭동이었다. 당시 미국의 언론은 흑인빈민지역에서 장사하던 한인 상점에서 흑인 소녀가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오인해 말다툼과 몸싸움 끝에 한인 두순자가 권총으로 흑인 소녀를 사망하게 만든 사건을 집중 보도했고, 흑인들은 백인들에 대한 분노를 한국인에게 돌렸으며, 한국인과 기타 아시아인을 향해 무차별 구타와 총격, 그리고 약탈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한인들 또한 재산보호를 위해 여러수단으로 방어를 하기 시작했지만 한국인들의 피해는 전체 피해액의 절반을 차지할만큼 컸다. 결국 5월1일에서야 출동한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의 진압으로 서서히 진압되었고, 이후 오랜시간에 걸쳐 한인 교민사회와 흑인사회의 관계가 서서히 개선되어졌다.

1960년 대한민국에서 4·19혁명이 일어나다.

대한민국의 역사속 대표적인 사건, 4·19혁명은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고,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 조작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로 비롯되어 일어난 혁명이다. 2월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구호를 앞세우며 대구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고 이것이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에도 3월 15일 부정선거 또한 도화선이 되어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학생들의 규탄시위가 벌어졌고, 무자비한 강경진압이 보도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격화되었다. 그리고 4월19일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몰려드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은 발포했고, 발포이후 시위대는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서게 되었다. 전국민적인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26일 결국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 정권은 몰락했고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윤봉길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상하이 전투승리 기념식장에서 행사가 마무리 될 무렵인 11시 50분, 윤봉길은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지고 남은 폭탄(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을 던지려다 일본 헌병에 제지를 당하자 “대한 독립 만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친후 체포됐다. 상하이 일본 거류민 단장인 가와바다 다사쓰구는 그날 사망, 상하이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은 20일 만에 사망, 제9사단장 우에다,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거류민단 서기장 도모노 등이 크게 다쳤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상하이 군법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오사카로 호송되었다가 가나자와 형무소로 옮겨져 그 이튿날인 12월 19일 총살되었다. 모진 고문에도 김구를 보호하기 위해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1896년 최초의 올림픽이 아테네에서 열리다.

1896년 4월6일 부터 4월15일까지 그리스 아테네에서 최초의 첫 근대 올림픽이 열렸다.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가 올림픽의 발상지였기 때문에 올림픽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개최지 자격을 얻었다. 이 올림픽이 진행되는 동안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가 조직되었다. 1회 아테네 올림픽은 성공적인 평가를 받았다. 당시 많은 국제 경기 중가장 많은 나라의 참여를 이끌어 냈으며, 올림픽 경기장이었다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은 경기를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 인해를 이뤘다. 1회 올림픽에서는 여자 선수는 참가하지 못했다. 입장행렬과 선언은 있었지만 성화나 성화 릴레이, 올림픽 선서등은 없었다. 올림픽 성화는 1928년 하계 올림픽 부터, 성화 릴레이는 1936년 하계 올림픽 부터, 선수의 개최선언은 1920년 하계 올림픽부터, 심판의 개최선언은 1972년 하계 올림픽에서 시작되었다. 첫 올림픽의 우승 선수는 은메달과 올리브 화환을 받았으며 2위를 한 선수는 동메달과 월계관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