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역사

1883년 3월 6일 태극기, 대한민국 정식 국기로 채택

1883년 3월6일, 고종의 명으로 처음 제작되었던 태극기가 정식으로 조선의 국기로 채택이 되었다. 태극기의 도안은 고종이 직접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고종은 청나라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 이라는 서적에서 '조선이 독립국이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 는 글을 보며 국기 제작을 계획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의 태극기는 백성을 뜻하는 흰색과 관원을 뜻하는 푸른색, 임금을 뜻하는 붉은 색을 화합되게 하여 국기를 제작하게 하였다. 하지만 붉은색의 동그라미가 일본 제국의 국기와 비슷해 반홍반청의 태극 무늬로 다시 정하고 그 둘레에는 조선의 8도를 뜻하는 팔괘를 그려 넣는 것으로 최종 문양이 결정되었고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수립과 함께 대한제국의 국기로 사용되었다. 이후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통해 '태극기' 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으며 태극기는 일제 강점기 시대 독립운동과 만세 시위에 사용되며 우리 민족의 항일 정신을 담은 상징이 되었다. 스페인 독감은 1918년에 발생했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말한다. 20세기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크게 유행했던 바이러스로 전 세계 인구의 3~6% 에 달하는 목숨을 앗아가며 인류 최대의 재앙이라 불린다. 이 독감으로 1918년에서 1919년 사이에 사망한 환자수만 약 5천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약 1500만명이 사망한 1차세계대전의 사망자의 수보다 3배나 많은 숫자이다. 한국에서는 총 인구 1670만명 중 44% 인 약 740만 여명이 감염되어 14만 여명이 희생되었는데 당시 스페인 독감을 '서반아 감기' 라 불렀다. 이로 인해 농촌에서는 추수를 못할 만큼 상여 행렬이 끊이지 않았고 조선 팔도의 민심이 흉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18년 3월 8일 스페인 독감의 첫 환자 발생

스페인 독감의 최초 발생지는 미국 캔자스로 첫 발생자가 확인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미군 병사는 열과 두통을 호소하며 의무실을 찾았는데 이 환자를 시작으로 하루만에 같은 증상을 호소하며 의무실을 찾아오는 병사가 500명으로 불어났다. 독감의 증상은 극심한 근육통과 두통 그리고 급격한 체온 상승과 심한 기침으로 폐출혈까지 이르게 했다. 스페인 독감으로 명명된 이유는 스페인세거 이 독감에 대한 보도를 처음으로 깊게 다루면서 붙여지게 되었다. 독감의 확산으로 전 세계는 감염자들을 격리하고 공공 의료를 통제하는 등 긴급조치를 취했지만 일손과 병원시설, 약이 부족하였고 면역력이 약한 노인과 어린 아이들이 가장 먼저 쓰러지기 시작했다. 당시 백신도 없었고 약효가 검증된 예방약도 없었지만 1919년 겨울 갑자기 독감이 사라지면서 언제 다시 발발할 지 모르는 바이러스의 공격에 공포는 지속되었다.

1959년 3월10일 티베트 봉기

'티베트 봉기'는 중국 공산당의 강압적인 통치에 반발한 티베트인들이 들고 일어난 반중국, 반공산주의 봉기를 말한다. 당시 중국은 티베트 내의 불교 저항 세력을 잔인하게 탄압했는데 수도원을 폭파하고 불상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잡아가는 등 티베트 사람들을 향한 억압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결국 1951년 티베트는 중국의 압력하에 17개의 항목에 합의하는 서류에 서명을 해야 했다. 티벳과 중국 양측이 베이징 시에서 체결한 이 조약에는 중국과 티베트 양측의 정치적 관계와 티베트의 자치권 보장, 종교적 자유 인정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중국에서 달라이라마를 납치하여 베이징으로 소환하려 한다는 루머가 퍼지기 시작했고 이를 불안하게 여긴 티베트 사람들과 중국군과의 긴장감을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달라이라마가 1959년 3월10일 중국군이 개최한 중국 전통 춤 공연 초청을 수락하자 루머는 일파만파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고 공연이 열리는 '노블링카'로 대규모의 인파가 달라이라마를 지키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렇게 1959년 '라싸교전'이 시작되었다. 조약을 맺은 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티벳의 역사적 장소와 수도원 주변으로 무기와 포병대를 대거 배치하였고 티베트의 수도사와 시민들은 19세기 소총과 대포로 무장하면서 대치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티베트의 첫 발을 기다리고 있던 중국군을 향해 달라이 라마는 협상의 서신을 계속 보냈지만 중국군은 전쟁을 위한 준비 상태에서 티베트의 선제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참지 못하고 중국쪽에서 첫발이 터지면서 '라싸교전'이 시작되었다. 이 교전은 재래식 무기로 대항하던 티베트 인들에게 역부족인 전쟁으로 이틀만에 종결되었고 교전으로 인해 티베트인 약 86,000명이 사망했다. 또 라싸의 주요 사원과 절은 폭격에 의해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며 약탈까지 이어져 역사적 유물들도 사라졌다. 교전이 시작되면서 달라이라마는 라싸를 탈출하여 인도로 망명했고 티베트 망명 정부를 수립하고 '십칠조협의'의 파기를 선포하면서 중국과 대립 상태에 있다.

1936년 3월 1일 후버댐 완공

20세기 최대 토목 공사 중 하나로 꼽히는 후버댐은 1936년에 완공되었다. 후버댐의 높이는 221.4m 길이는 379m로 네바다주와 아리조나 중의 경계인 블랙 협곡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 완공되었을 때는 '볼더댐(Boulder Dam)'으로 불렸지만 미국 31대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 를 기념하기 위해 1947년에 '후버댐' 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후버댐은 1931년부터 1936년까지 5년이 걸려 완공되었는데 댐을 건설하기 위해 동원된 인력만 무려 2만 1천여명으로 건설 과정에서 112명의 인부들이 사망하는 사고도 발생했다. 댐 건설의 과정은 협곡의 벽을 폭파해 콜로라도 강의 물줄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8천여명의 인부들이 협곡 바닥의 바위를 치우는 것부터 시작되었으며 단단하게 짓기위해 일자형이 아닌 구부러진 중력댐의 형태로 만들었다. 1931년 연간 40억 kwh의 전력을 생산하는 후버댐은 미국 서부 콜로라도 강의 잦은 범람을 막아주고 주변 농토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