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역사

1521년 1월 3일 교황 레오 10세, 마르틴 루터 파문

마르틴 루터는 원래 법학도였다. 에르푸트르 대학에 입학해서 법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의 인생을 바꾸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비오는 날 길을 가다가 갑자기 천둥번개가 몰아쳤고 겁에 질린 루터는 '성 안나여, 저에게 힘을 주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저는 수도자가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그리고 이후에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사가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박사 학위를 받고 성경을 공부하면서 점점 당시의 가톨릭과는 다른 진보적인 종교관을 확립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그의 생각들이 완벽하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517년에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였다. 루터는 이에 크게 반발하였고 면죄부가 판매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 당시는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이 막 나타난 이후여서 95개조 반박문은 유럽에 삽시간에 퍼지게 되었고 교황청은 이런 흐름을 막고자 했다. 루터는 주장을 철회하라는 교황청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교황은 그를 로마로 잡아와 종교재판에 회부하려 했다. 루터는 이에 대한 논쟁을 전개해 나가면서 점점 가톨릭교회와 멀어지게 되었고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는 60일 이내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선포했다. 루터는 교황의 교서와 가톨릭교회 법전을 불태우며 가톨릭과 완전히 결별을 했다. 그리고 1521년 1월 3일 마침내 그는 파문됐다. 그리고 이것이 종교 개혁과 개신교 탄생의 시발점이 되었다.

1981년 1월 20일 이란에 억류된 52명의 미국인 인질 444일 만에 전원 석방

1979년 11월, 주 이란 미국 대사관에서 인질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 까지 이란은 팔레비 독재왕의 정치하에 있었는데 그는 친미 노선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는 국민들의 반미감정으로 이어졌다.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왕정이 타도되고 호메이니의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되자 이런 반미감정이 표출되었고 이란과 격파 학생 시위대가 테헤란 미대사관에 난입하여 대사관을 점거했다. 당시 대사 관에 있던 70여 명의 외교관은 인질이 되었다. 미국은 이란산 원유 수입 금지 조치 등을 통해서 초강경 자세를 유지했다. 갈등은 고조되어만 가는 가운데 1980년 4 월 특공대를 투입하여 인질을 구출하려 했으나 8명의 특공대원이 사망하면서 실 패로 끝났다. 1980년의 9월로 접어들면서 호메이니의 요구 조건이 조금은 완화 되었고 협상이 활기를 띠었다. 게다가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되면서 인질사태를 반드시 종결 시켜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알제리의 중재로 양국간 간접 협상 이 진행되었고 미국이 동결된 팔레비 왕정의 재미자산을 이란에 반환하기로 하면서 인질들은 극적으로 풀려났다.

1987년 1월 14일 대학생 박종철 사망 사건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이 경찰에 연행되어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고문에 의해서 사망했다. 후대에 이 사건은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이라고 불려졌다. 박종철은 당시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의 주요수배자인 박종운의 후배라는 이유로 체포 되었다. 체포영장도 없이 대공수사관들이 그의 하숙집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다음 날인 1월 15일 사망한 채로 나오게 된다. 당시에 경찰은 "책상을 턱!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라는 것을 공식 사인으로 언론에 발표했다. 물론 이는 거짓이었고 후에는 고문에 의한 질식사였음이 밝혀진다. 당시에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내무장관 정호용이 한 말인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라는 말도 후에 유명해졌다. 전두환 정권은 계속적으로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 고문에 가담한 경찰의 일부를 수감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국민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민주화 운동가였던 이부영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등의 폭로에 의해서 전두환 정권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다는 점이 속속 밝혀졌고 이후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전두환정권은 상황을 타개하려고 장관급 각료 6명을 경질하는 개각 까지 단행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후 국민의 분노는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전두환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된다.

1948년 1월 26일 제국은행 사건

1948년 1월 26일 은행이 문을 닫은 직후인 오후 3시경 한 남자가 은행에 들어왔다. 이 남자는 자신이 보건 기구인 후생성의 직원임을 알리면서 "근처 가택에서 집단 이질이 발생 했고 소독을 진행 하려 하니 그전에 예방약을 마셔 달라"고 말을 한다. 당시 일본은 미군 정치하였다. 남자는 미군정의 이름을 들먹였고 도쿄도 방역반임을 표시하는 완장을 차고 있었으며 후생성 직원의 명찰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은행 내에 있던 16명의 사람들은 의심 없이 그가 건네는 액체를 마셨다. 그 액체는 청산가리가 함유되었었고 그 자리에서 11명이 사망했다. 그 틈을 타 범인은 현금 16만 엔과 수표 1만 7450엔어치를 훔쳤고 도주했다. 현장의 상황이 극히 혼란스러운 탓에 경찰의 초동수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범인이 훔쳐 간 수표가 현금화된 기록이 있었으며 이에 앞서 서 비슷한 수법의 미수에 그친 사건이 두 번있었다. 단서는 적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화가였던 히라사와가 범인으로 체포되었다. 히라사와는 수표 사기를 한 전과가 있었고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없었던 점 등에서 유력한 범인으로 보였지만 피해자 들과의 대질신문에서 그가 진짜 범인이라고 단언한 사람은 없었다. 결국 결정적 증거는 그가 한 자백이 되었다. 그에게는 사형이 구형되었지만 소설가 마츠모토 세이초 등은 그의 자백이 고문에 가까운 취조에 의한 것이라며 구명 운동을 펼쳤다. 그는 사형 구형을 받고도 오랫동안 사형당하지 않았는데 사건의 불확실한 부분 때문에 역대 법무대신들이 사형집행 명령서에 서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히라사와는 결국 형무소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이 제국 은행 사건은 미제로 남게 되었으며 히라사와의 양자와 지원자들이 그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