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연의 그림과 함께하는 수필 - Wine 이야기

무심한 마음으로 살다, 갑작스레 다가온 한 해의 끝을 느끼게 되면 대체 무엇을 하였을까 하는 두려움과 떠나간다는 안도함이 함께 찾아온다.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에, 늘 곁에 있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어 위로받으며 새로운 기운과 힘을 얻어 늘 평화롭기를 희망한다. 가끔 좋은 분들과 멋진 저녁 만남이 준비되고 화려한 식탁 위 자줏빛 투명하고 오묘한 색의 와인 몇 잔으로 인해, 잠시나마 세상일에 억지 부려 끼워놓은 힘을 거두며 삶이라는 커다란 명제 앞에 애기처럼 천진해진다. 그렇게 복잡한 이야기들은 다 잊고 촛불 아래 얼굴 가득 웃음 지으며 살아온 것들을 뒤돌아보는 짧은 순간, 그 자줏 빛은 지독히도 잘 어울리는 도도한 색감이다.

와인은 슬픈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태초부터 태어난 그대로인, 포도라는 자신을 철저히 버려야만 성숙한 와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버려야만 자신이 될수 있는 그 완벽한 버림의 아픔을 간직한 채, 긴 시간 숙성되고 천천히 익어가기에, 성경 속에서도 - 수 없는 세월 속에서도 멋진 찬사와 감동과 사랑으로 보답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음이다. 조금이라도 포도 자신의 맛을 드러내면 그것은 절대 와인일 수 없으며 또 혼자 빛나는 자신을 꿈꾸지 않고 - 다른 이들의 축제와 슬픔을 위한 첫째가 아닌 두 번째로서의 삶으로 살아야, 더 나은 새로운 개체로 거듭나며 또 사라진다.

매년 늘상 똑같은 후회와 결심으로 한해의 끝 언덕에 또 서성이고 헤매이지만, "어디쯤 가고 있을까, 얼마만큼 와있을까, 그래도 잘 가고 있을까"라는 질문은 이제 그만하기로 한다. 가끔은 유난히 반짝이는 세상의 별이 되고 싶을 때도 있고, 가지지 못하는 것을 턱없이 원하는 지나친 욕심도 있고, 자만하며 겸손치 못해 받았던 상처를 딱 그만큼 되돌려주고픈 때도 있지만, 완벽한 자신의 버림으로 인한 와인의 자줏빛 색감처럼 한 번쯤 그냥 다 버리고, 오늘 하루 내게 와있는 것들과 같은 편이 되어 살아가는 평화로운 날을 꿈꾼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