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역사

1974년 12월 8일 그리스 국민투표로 142년간의 왕정 종식

1974년 12월8일 그리스가 국민 투표를 통해 142년간의 왕정을 종식 시키고 공화정을 출범 시켰다. 그리스인과는 한 방울의 피도 섞이지 않은 독일과 덴마크 출신의 왕들이 다스려온 기나긴 왕정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이날 투표에서는 군주제를 반대하는 도시 유권자들의 압도적 투표에 의해 공화제 찬성이 군주제 찬성 투표를 전국에서 5:1로 누르고 압승을 거두었으며 공화제 찬성은 73% 를 기록했다.
투표 결과로 그리스 정부는 12월 23일 각의를 열고 과거 국왕이 행사했던 대권과 다른 일부 권한을 대통령에 부가하는 공화국 헌법 초안을 승인했다.
그리스는 터키로부터 독립한 뒤 1832년부터 142년간 왕정을 실시해 왔고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7명의 왕이 그리스를 다스렸다. 이후 배태된 공화파와 왕당파 사이의 갈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군부통치 종식과 왕정 폐지가 맞물림으로써 민주주의와 공화정이 동시에 출발했다는 것은 상징적이지만 그리스에서 왕정 폐지를 처음 발의한 세력이 군사정권이었기에 두 적이 서로 싸우면서 그리스 정치에 어려움이 지속되기도 했다.

1894년 12월 22일 드레퓌스가 종신형을 선고 받다.

1894년 프랑스는 좋지 않은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보불전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과의 전투에서 처절하게 패배한 프랑스는 50억 프랑에 이르는 보상금을 지불해야만 했고 국가적 자존심에도 상처를 입었다. 결국 국민들은 극도로 보수화 되었고 전쟁에서 지게 된 원인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육군의 기밀 사항이 포함된 한 편지가 발견되었고 프랑 스군 육군 포병 대위인 드레퓌스가 편지의 발신인 이가 스파이로 지목 되었다. 이때 핵심 증거가 된 필적은 그저 조금 유사한 정도 였지만 반 유태인 정서가 팽배했던 당시 프랑스에서는 그를 범인으로 몰아 세웠고 결국 1894년 12월 22일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년이 지난 1896년 정보국에 근무하던 피카르 중령은 우연히 당시의 문건을 보고 진짜 범 인에 스테라지 중령의 문체가 서류의 것과 똑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결국 그는 재심을 요구 했지만 상부는 이를 받아 들이지 않고 피카르 중령을 좌천 시켰으며 보수화 된 국민 여론은 이미 드레퓌스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진범인에 스테라지 중령은 무죄를 선고 받았고 영웅이 되었지만 피카르 중령은 군사 기밀 누설죄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군국주의가 만연하는 세태에 충격을 받은 당시의 대문호에 밀졸라는 한 신문을 통해 유명한 대통령의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이것이 바로 '나는 고발한다' 이다. 나라는 재심 반대와 재심 찬성 두파로 갈렸으며 날마 다 거리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결국 드레퓌스는 1906년 무죄를 선고 받았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1995년 시라크 당시 프랑스 대통령을 통해서 프랑스 군이 드레퓌스 대위가 무죄라는 것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1987년 12월20일 필리핀 여객선 침몰, 4375명 사망

1987년 12월 20일, 필리핀 여객선 도나파즈호가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려는 승객들을 한 배 가득 싣고 레이테 섬을 떠나 마닐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승객이 잠자던 밤 10시30분에 8,800톤의 가솔린을 적재한 유조선 벡터호와 충돌하며 폭발했다. 이후 가솔린으로 인해 불이 붙어 도나파즈호와 벡터호는 순식간에 불길에 뒤덮였고 근처 바닷물까지 불길에 휩쓸리면서 온도가 급속도로 올라가 바닷물까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날 도나파즈호에는 정원의 3배이자 진수 때의 7배가 넘는 무려 4,388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도나파즈호의 소유주인 술피치오 선박회사가 불법적으로 암암리에 표를 계속 팔았기 때문이었다. 즐거워야 할 성탄절 휴가 여행은 생지옥으로 바뀌었고 도나파즈호에 승선한 승객 4,388명 중 살아난 사람은 단24명 벡터호에서는 13명 가운데 2명만 살아남았으며 생존자는 모두 중화상을 입었다. 사망자 수는 4,375명으로 인류 역사상 벌어진 여객선 침몰 사고에서 사망자가 가장 많은 참극으로 손꼽히고 있다.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다

1598년은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있던 해였다. 이순신은 이미 12척의 배로 수백 척의 왜군을 궤멸시킨 '명량해전' 을 치른 이후였다. 그는 조선의 바다를 다시 장악하고 왜군의 모든 계획을 분쇄 시켰다. 그러던 중 도요토미히데요시 가 사망했고 왜군은 재빨리 퇴각을 해야만 할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이순신은 절대 일본군의 퇴각을 용인할 생각이 없었고 결국 노량 해협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순신은 매복과 기습, 화공 등으로 완전히 일본군에게 승기를 빼앗았기 때문에 '노량해전' 또한 승리로 장식되기 일보직전이었다. 오전 8시경 이순신은 일본 수군을 추격하여 격파하다가 그만 적의 총탄에 쓰러졌다. 탄환에 맞은 이순신은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의기록중에서는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 분기 탱천하여 무리하게 전투에 나섰다가 부상 당한 장수들의 기록도 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의 걸출한 장수였던 이순신 장군은 비록 전투에서 사망했으나 그와는 별개로 '노량해전' 또한 조선 해군의 압승으로 끝났고 이를 통해 조선은 임진왜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98년 12월 7일 아르메니아 스피타크 대지진, 2만5천여명 사망

인류 최악의 지진으로 손꼽히는 '아르베니아 스피타크 대지진'이 1998년 12월 7일 남부 아르메니아 공화국 북부산악지역과 터키 동부지역에 발생했다. 리히터 지진계로 진도 9가 넘는 강진으로 당시 80년만의 최악의 지진으로 기록되었다. 진원지는 인구 30만의 아르베니아 제2도시 레니나칸시에서 50km 떨어진 지점이었으며 피해지역은 아제르바이잔공화국 등 코카서스 일대였다.
스피타크 지진은 약 2만5천명의 사망자를 냈고 재산 피해 만도 140억 달러에 달하는 등 도시 대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특히 사망자들 중에는 아제르바이젠에서 인종 박해를 피해 온 난민들이 많아 안타까움을 더했다. 소련 정부는 즉시 현장에 구조대를 파견했지만 피해의 규모가 너무 커 이례적으로 서방 국가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여러 서방 국가들이 소련에 구조대들을 파견하였다. 추후 조사 결과 대규모 사상자의 발생 원인은 지진에 견딜 수 있는 내진 설계를 무시하고 도시화 하는 과정에서 부실 시공을 규제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파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