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연의 그림과 함께하는 수필 - 대추를 말리며

가을이 점점 색을 입혀가고 있다. 세상의 살아있는 모두는 결실을 서두르는 중이다. 마당 구석진 곳에 감나무와 사과나무 사이 겨우 자리잡은 채,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해 굽어진 모양새인 대추나무 몇 그루도 용케 잘 자라고 있다. 뜨거운 여름날이면 기다랗고 엷은 연초록빛 가지에 주렁주렁 하얀 작은 꽃들을 피우다, 서서히 때가 되면 그 작은 꽃들이 제법 튼실한 열매를 맺어간다. 감이 가지는 유혹의 주홍빛도 새콤한 사과의 진한 빨강빛도 아니지만, 부끄러운 듯 수줍은 노란빛을 띠며 존재감을 나타낸다. 이때가 되면 낡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제법 통통한 몸매를 찾아가다, 몰래 입안 가득 가을이 주는 아삭한 달달함을 맛보며, 수확한다.

아직 낮이 따가운 오후, 한가득 따놓은 대추를 손질하며 땀 흘린 얼굴을 식히려 일어서면 어느새 시원해진 가을 살갗이 선선하다. 살던 곳을 떠나 이 넓디넓은 땅으로 옮겨온 후, 문득 기억 속에 떠오른 대추나무를 찾아 심고, 가을이 오면 바구니 넘치게 따다 볕이 좋은 마당 동쪽 귀퉁이 넓은 곳에 말리며, 오래전에 떠나왔던 곳을 추억하며 설렌다. 미처 다 가져오지도 못한 채 얇은 등 뒤로 몇 번을 돌아보며 떠나 왔던 모든 것들을 그냥 잊은 척 - 모르는 척 지내지만, 늘상 마음속에는 작고 많은 일을 몰래 숨겨놓고 시침 떼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하나씩 떠오르는 기억을 꺼집어내 흉내 내다, 새삼 잊지 않고 있는것들에 또한 신기해한다. 이렇게 예전의 추억들을 찾아 가꾸며 거두고 말리는 모습을 보며 자란 나의 애들도, 먼 훗날 또 다른 어느 가을날 오후, 대추를 걷고 수확하다 설레게 불어오는 바람에 기억의 한편을 떠올리며, 한가득 펼쳐놓은 널따란 햇빛 아래 그들의 삶을 말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차를 끓이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작년에 말려둔 대추 한 움큼 손에 쥐고 느껴보다, 창틀 너머로 서서히 갈색빛으로 말려가는 대추를 바라보며, 또 다른 풍성한 내년의 가을을 그려본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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