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역사

1942년 10월1일 조선어학회 사건 발생

1921년 12월에 창립된 조선어학회는 한글학회의 전신이자 국어연구학회를 모체로 하며 우리 한글을 지키고 널리 알리기 위해 활동했던 단체이다. 조선어학회는 1926년 한글날을 제정하였으며 1930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철자법개정안을 스스로 수정하여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고 1933년에 발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특히 1929년 10월 31일 조선어학회는 당시의 명망가 108명을 중심으로 조선인이 조선어를 학습하기 위해서는 조선어 사전이 필요함을 느끼고 '조선어편찬위원회' 를 결성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에서 늘 어려움을 겪었고 한글을 널리 알리기 위한 그들의 활동에는 많은 제약이 끊이지 않았다. 1934년에는 조선어학회 주관의 한글강습회가 중단 되었고, 대중 집회도 금지되었으며 1940년에는 한글 일간지를 폐간시키는 등 우리의 말과 글을 말살시키기 위해 일제는 온갖 만행을 자행했다. 또 학교마다 조선어 과목을 폐지하고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의 상용을 강요 했다. 이런 와중에 서울에서 조선어학회가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일본 경찰은 1942년 10월 1일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등 조선어학회 핵심 회원 11명을 갑자기 체포하여 서울 종로경찰서와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수감했고 하루 뒤 열차에 태워져 함경남도 홍원경찰서로 압송했다. 이들은 외에도 해를 넘겨 1943년 4월초까지 조선어학회의 조선어 연구자와 후원자, 회원 등을 계속 체포하는 등 탄압이 이어졌다. 이때 체포된 33인 중 16명은 기소, 12명은 기소 유예되었는데 기소된 이들 중 이윤재와 한징은 옥중에서 사망했고 다른 이들도 재판을 거듭하고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복역했다.

1971년 10월1일 장발, 미니스커트 등 단속

1971년 10월1일 풍속 사범을 단속한다는 발표와 함께 단속이 시작되었다. 풍속 사범 단속 대상은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중심으로 음서, 음화, 비밀 댄스 홀 등 고유의 미풍 양속을 해치는 일체의 행위였다. 당시 한국은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선보인 후 거리에 미니스커트 열풍이 일었고 세계적인 팝 가수 클리프 리차드 등의 외국 스타들이 내한 공연을 하면서 남자들에게 장발이 유행하는 등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시대를 향한 젊은이들의 열망이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변화의 물결이 대한민국 정치계에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었고 결국 퇴폐 풍조라는 명목하에 단속이 시작되었다. 10월 1일 첫날 2600여명이 장발족 단속에 걸려 머리를 깎였고 한달 내내 수많은 장발족들과 비밀요정등이 단속 대상이 되면서 5만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적발되었다. 두발 단속 기준은 옆머리가 귀의 윗부분을 조금이라도 덮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으며 뒷머리는 옷깃 윗부분을 가리지 않아야 했다. 미니스커트의 경우에는 무릎 위 15cm 이상을 단속했다. 때문에 거리 곳곳에서는 장발의 남자들과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들과 경찰간의 크고, 작은 승강이를 볼 수 있었다.

1929년 10월24일 주가 대폭락

'암흑의 목요일', '검은 목요일' 이라고 불리게 된 1929년 10월 24일, 뉴욕의 월 가에 있는 주식 시장에서 주가가 사장 유래없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치솟던 주가의 갑작스러운 폭락에 사람들은 정신없이 주식을 팔기 위해 주식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지만 이미 주식을 살 사람은 없는 상황 이었다. 다행이 이날 은행가의 큰 손들이 방어에 나서며 폐장 직전 주가가 안정되며 모두를 놀라게 한 목요일이 지나갔다. 하지만 이날의 주가 폭락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닌 경제 대공황의 신호탄이었다. 검은 목요일 이후 5일이 지난 29일 주가는 다시 폭락했는데 이날 하루에 쏟아져 나온 매물만 무려 1,650만 주나 되었다. 하루 동안 떨어진 다우존스 평균 지수는 40포인트, 100억달러가 휴지조각이 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미국은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며 경제적으로도 세계 제1의 대국이 되어있었다. 전쟁시 연합국에 빌려준 돈으로 최대의 채건국이 되었고 뉴욕은 런던을 제치고 국제적 금융도시로 발돋움을 하고 있었다. 자동차 산업의 눈부신 발전은 기타 다른 산업의 발전을 이끌어갔고 이로 이해 대 기업의 규모들은 더욱 커져가고 있었다. 결국 상류계급의 부가 계속 상승하면서 경제의 활력보다는 상하층 소득의 차이가 심화되었고 주식 열풍을 불러와 주가만 치솟게 만드는 형국이었다. 결국 주가의 폭락이 시작되며 미국 경제의 대공황도 함께 시작되었다.

1983년 10월9일 버마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

1983년 10월 9일 아침, 버마 아웅산 묘소에서 큰 폭발 사건이 일어났다. 이날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아웅산 묘소 참배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1983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10월 8일 공식 수행원 22명과 비공식 수행원 등을 데리고 동남아 5개국 공식 순방을 시작했는데 첫 순방지가 바로 버마(미얀마)였다.
10월 9일 버마 아웅산 묘소 참배 행사는 차량 정체로 인해 예정 시간 보다 다소 늦게 도착하게 되었고 늦는다는 연락을 받은 행사 준비팀은 애국가 예행 연습을 하게 되었는데 폭탄 테러 용의자였던 신기철이 이를 오인하여 미리 설치해 두었던 폭탄 스위치를 작동 시켰다. 대통령과 관계자들은 폭발이 일어난 곳에서 불과 1.5km 떨어진 거리에 있었기에 가까스로 큰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이 폭발로 미리 도착해서 준비중이었던 한국인 17명과 버마인 4명이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만 49명이 발생했다. 이에 전두환은 남은 순방계획을 모두 취소하고 즉시 귀국해 비상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북한의 새로운 도발을 대비하기 위해 전군에 비상사태를 지시했다. 버마 당국의 수사결과 이 사건은 북한 김정일의 친필 지령을 받은 북한 인민군 정찰국 산하 특수 8군단 소속의 강창수 부대에서 선발된 특수 요원들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1983년 9월 제련소 직원으로 위장하여 버마에 잠입한 후 북한 외교관 자택에 머물면서 테러 계획을 수립했고 행사 이틀 전 새벽 아웅산 묘소 곳곳에 폭탄을 설치하고 노숙하며 테러를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강을 헤엄쳐 도주하던 조장 진모 소좌는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버마 경찰과 대치 끝에 체포되었으며 신기철과 강민철은 경찰과 교전을 벌이며 저항하던 중 신기철은 사망했고 강민철은 체포되었다. 이후 진모 소좌는 3년 후 사형되었으며 강민철은 2008년 옥중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