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역사

1835년 9월 15일 / 찰스 다윈 갈라파고스 제도에 도착하다.

찰스 다윈의 그 유명한 진화론을 완성케 한 갈라파고스는 북반구에서 살아온 이들의 자연적 선입견을 쉽사리 깨어버리는 희귀한 동식물이 가득하고 이 세상을 벗어나 다른 세상에 이른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곳이다. 찰스 다윈은 비글호의 두번째 항해(12월 27일, 1831년~10월 2일, 1836년)에 참여해 이곳에 이른다. 로버트 피츠로이의 지휘 하에 비글호는 대서양을 지나 남미 해안의 정밀한 수로학 탐사를 실시했으며, 타히티와 오스트레일리아를 거쳐 세계일주를 했다. 원래 2 년으로 계획됐지만, 5년을 지속했다. 육지에서 3년 3개월을 보냈고 바다에서 18개월을 보냈다. 22세의 젊은 대학원생 찰스 다윈은 박물학자 자격으로 비글호에 탑승해 1835년 갈라파고스 제도에 도착했다. 비글호 탐험을 통해 그는 지질학자와 화석 수집가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1839년 가장 위대한 과학탐험기라 불리우는 '비글호 항해기'를 출간해 작가로서도 명성을 얻는다. '비글호 항해기' 는 '종의 기원'의 핵심인 '적자생존', '자연선택과 진화'에 대한 시발점이 된 책이다. '종의 기원'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진화론'을 담고 있는 책이다. 크리스트교가 지배하던 유럽에서 창조설은 곧 진리였던 시대였다. 지구상 모든 생물체는 신의 뜻에 의해 창조되고 지배된다는 신 중심의 창조설을 뒤엎은 진화론은 비글호의 갈라파고스 제도 도착에서 시작되었다. 종교계 등에서 격렬한 비난 공세가 이어졌지만, 다윈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학설을 제창하고 수많은 저서를 집필함으로써 새 시대를 열었다.

1959년 9월 17일 태풍 사라호 참사

태풍 사라호는 1959년 9월11일 발생한 제 14호 태풍으로 한반도 역 사상 재산 및 인명 피해를 가장 크게 낸 최악의 태풍으로 기록 되었다. 태풍 사라호는 1959년 9월 17일 새벽부터 당일 밤 12시까지 전남과 경남지역 그리고 중부 내륙지역을 강타했다. 중심기압 905hPa, 최대 풍속은 10분 평균 70m/s, 1분 평균으로는 85m/s에 달하는 슈퍼 태 풍 급이었다. 한반도가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었던 것은 10시간 정도 였지만 이 태풍으로 92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고 98만 5천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또 건물 121,037동과 선박 9,329척이 피해를 입는등 약662억원의 재산 피해를 남겼다. 태풍 사라호를 계기로 가을이면 찾아오는 태풍에 대한 대책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부산은 전쟁 이후 열악한 주거 상황이었기에 더 큰 피해가 발생 했으며 전국에서는 재난을 당한 이웃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 59분,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 지역에 진도 7.9의 초강력 지진이 발생했다. 건물이 무너지고 나무들이 쓰러졌으며 도로는 땅 밑으로 꺼지고 다리도 끊어졌다. 지진은 바로 대 화재로 이어졌고 도쿄와 요코하마 지역을 비롯 관동 일대는 13초간의 지진으로 모든 것이 무너지며 큰 피해가 발생했다. 이 지진과 화재로 인한 사망자는 약 14만 명, 행방 불명은 3만7천명, 이재민은 340만명이 발생했다.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은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고, 사람들은 정부를 향해 구제품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유언비어가 퍼졌다. 그것은 "조선인들이 방화를 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어 넣었다." 는 내용이었다. 이 소문은 패닉에 빠져 날뛰던 사람들에게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불안에 빠져 있던 일본인들은 조선인에 대한 증오가 하늘을 찔렀다.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군대와 경찰이 투입되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자경단을 조직하게 했다. 자경단이란 위급 발생 시 각 마을의 재향 군인과 청년들을 중심으로 주민과 시설 등을 보호하고 재난을 수습하는 민간 자치 기구다. 지진 발생 후 소집된 자경단은 총 3689개. 경찰은 이들에게 조선인을 주의하라고 경고하며 총기를 지급했고 조선인을 살해해도 좋다고 지시했다.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돌아다닌다는 유언비어와 함께 자경단은 조선인들을 찾아내 살해하기 시작했다. 자경단에게 잡힌 조선인들은 말할 기회 조차 갖지못하고 처참하게 학살 당하기 시작되었다. 일본인들은 여자와 어린이, 노인들도 예외없이 잔인하게 살해했다. 죽창과 칼을 동원했으며 그보다 더 심한 방법으로 조선인들은 무참히 학살 당했다.
당시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은 희생자 수가 2명이라고 밝혔지 만 아무도 믿지 않았고 관동 대지진 당시 희생된 조선인의 수는 약 6661명에 달하거나 그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후 관동 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사건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일본과 단교 된 상황에서 조사가 어려웠던 면도 있었지만 한국 정부에서도 이 문제를 회피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 징용 문제 등 큰 현안이 외교 문제로 비화하는 상황에서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기를 꺼리는 분위기였다. 진실을 위한 진상조사 요청도 있었고 국회 여야 의원 103명이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 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를 설치하는 특별법안을 발의했으나 통과하지 못하고 폐기되기도 했다.

1923년 9월 3일 박열, 일왕 암살음모로 피검

18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생활했던 박열. 그는 1921년 11월 첫 사상 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했다. 흑도회에서는 흑도라는 잡지를 발간해 항일 운동을 진행했으며 조선 노동자들의 가혹한 노동 착취와 학대로 많은 사람들이 학살 되는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등 항일 운동을 펼쳤다. 1922년에는 흑우회를 조직했는데 흑우회 멤버들은 기관지 '민중운동' 을 순수 조선문으로 발간했다. 당시 일본에서 조선문으로 된 잡지가 발행되었다는 것은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런 활동들로 인해 박열은 일본의 타겟이 되었지만 이후에도 끊임없이 다양한 항일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1923년 9월 3일, 일왕 다이쇼와 히로히토 왕세자 등을 폭탄으로 암살하기로 모의했다는 혐의로 그의 동거녀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채 옥살이를 했으며 22년 2개월의 옥살이 후 1945년 10월 해방으로 석방되었다. 박열은 석방후 일본에 남아 우익 교포 단체인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아 활동했다. 박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초청으로 귀국했다가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되었고 1974년 북한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