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연의 그림과 함께하는 수필 - 여행의 잔재, 스페인에서

비우려고 떠났던 여행길이, 가방 아니 머리와 마음속 가득 채워진 체 더 많이 무거워져 돌아온다. 어떠하든 반드시 내가 살고 있는 곳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 여행이다. 그렇지, 되돌아오지 않으면 분명 그건 전혀 다른 단어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니까.

돌아와야 한다는 걸 건드리지 않은 체, 살아오며 품었던 아련한 여러 상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만나 보고자했다. 화려한 명성에 어울리는 장대한 궁전들과 끝없이 많은 성당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루고자 다른 이들의 목숨까지 바쳐야 했던 역사 속의 인물들과 수 없는 삶과 죽음의 사건 - 그 모두를 책상 앞에서 남들의 대화 속에서 또한 실제보다 멋진 사진 속에서 공부하고 들었고 보았던 것이기에, 이제는 만나볼 때가 되었다 싶어 한겨울 추위에도 잠시 서둘렀다. 모든 것들을 타인에 의해 고정된 탄성의 감동이 아니라, 생생하게 나의 눈을 통해 들어와 잠깐 머릿속에 머물다 바로 순식간에 가슴으로 내려와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아픔과 슬픔과 환희로 소리치며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렇지만 첫 번째 드러난 만남은, 오히려 가늠했던 거보다 더 과장되게 웅장하였고 상상 속보다 훨씬 더 화려했으며 도무지 인간의 한계를 넘어버린 섬찟한 두려움 때문에 - 스스로의 무능함과 게으름과 자책으로 - 감정의 바닥까지 건드려져 긴 여행 내내 아팠었고 유독 심한 추위에 떨었었다.

언제부터인지, 아주 오래된 과거를 만나러 떠난다. 현재 아니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는 사라져 없어진 채 이름으로만 남겨진, 옛날의 누군가와 또 그 누군가가 살며 아끼며 간직했던 물건들과 그 안에서 무엇을 하며 어떤 삶을 살았든가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죽은 자의 이야기들이 살고있는 자들에게 끝없이 연결되어 그 역사로 말미암아 깨우치며 배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어느 소설 속 슬픈 여주인공이 그러더라 - 어쩌면 이 세상의 잊을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뒤로 남겨져 있으며 그래서 과거는 버릴 수가 없는 것이라고.

사라졌다는 무의 아픔과 그 차가운 서산함으로 남겨진 것들에게서, 나는 여행 내내 무슨 의미를 어떻게 만났으며 또 지금은 무엇으로 나 자신의 생각과 살 속으로 남겨졌으며 - 오늘에서야 늦은 아침 커피 한잔을 든 체 - 과연 또 얼마만큼 달라져 가고 있을지를 묻고 있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한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