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역사

2003년 2월 1일 컬럼비아호 공중분해되다

2003년 2월 1일 미국 항공우주국에서 쏘아 올린 우주왕복선 컬럼비아 호가 지구귀환 도중 공중 폭발했다. 이 사건 때문에 승무원 7명은 전원 사망했다. 미국은 최초의 유인우주선을 달에 착륙시킨 아폴로 프로젝트 이후에 유인 우주선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해왔는데 50년이 넘는 미 유인 우주선 발사 역사상 우주선이 지구 귀환이나 착륙도중 사고가 일어난 것은 컬럼비아호가 유일하다. 컬럼비아호는 2003년 1월 16일 첫 이스라엘 우주인 1명과 여성우주인 2명등 미국 우주인 6명을 태우고 플로리다 주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되어 각종 과학실험을 마친 뒤2월1일오전9시16분 케네디 우주센터에 착륙할 예정이었다.하 사고 직후 테러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이는 단순한 추측으로 사실 무근인 것으로 밝혀졌다. 사고의 원인은 출발 당시 파편이 튀며 왼쪽 날개 부분에 맞은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사고는 1986년에도 있었다.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직후 공중 폭발했고 승무원 7명이 사망을 한 바 있다. 미국 항공우주국은 이후에 유인 우주선 발사를 한동안 중단하 다가 3년 5개월이 지난 2006년 7월에 디스커버리호를 쏘아 올렸다. 발 사는 성공적이었고 모든 프로젝트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964년 2월 7일 비틀즈가 미국을 방문하다

1964년 영국의 록밴드이자 지금은 전설이 된 비틀즈는 처음으로 미국 을 방문하게 된다. 미국을 방문할 때 비틀즈는 이미 슈퍼스타였다. 영국 에서는 비틀즈에 환호다가 기절하는 여성 팬들이 속출했고 그들의 네 번째 싱글이자 첫 밀리언 셀러인 SheLoveYou는 영국에서 가장 빨리 팔린 음반 이자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 되었다.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4만 달러를 들여 미국 진출을 위한 마케팅 캠페인을 벌였다. 2월 7일 비틀즈가 공항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수천명의 팬들이 그들을 맞이하며 비명을 질렸다. 이러한 광적인 팬들을 비틀 매니아라고 불렀는데 이는 미 사회 전역에 퍼지는 광풍과도 같았다. 언론에 서는 비틀즈의 인기를 보면서 브리티시 인베이전(영국의 침공)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비틀즈의 영향력을 인정했다. 이러한 비틀즈의 성공은 더 후나 롤링 스톤즈 같은 영국밴드들이 미국에 진출하게 하는 발판이 되었고 이후에도 많은 영국 밴드들이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이어갔다. 비틀즈는 에드 설리번쇼에도 출연하게 되는데 이것이 미국 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당시 에드 설리번쇼는 무려 7300 만명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미국 인구의 34퍼센트에 달하는 기록이고 현재도 깨지지 않는 미국 텔레비전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이었다. 이후는 역사가 되었다. 비틀즈는 자신들의 음악을 히트시키면서 록큰롤의 전설로 남게 된다.

1951년 2월 11일 거창양민학살사건 발생

1951년 2월11일, 6.25라는 혼란속에서 수백명의 거창군 양민들이 학살되는 참극이 발생했다. 1.4후퇴가 시작되면서 빨치산 대공세가 강화되자 거창군 신원면의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 일대에서 공비 토벌 작전 중이던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무고한 부락 주민 719명을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내탄 부락과 박산 계곡에서 무참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대규모의 정규군의 투입에도 빨치산 토벌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빨치산들은 험준한 산악 지대를 근거로 전세에 따라 수시로 기습과 퇴각을 하면서 토벌군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또 작전 지역안에서는 민간인을 상대로 약탈, 부녀자 폭행, 살상등의 민간인에 대한 국군의 만행이 이어졌고 일대 주민들로 하여금 빨치산의 활동을 묵인 방조하거나 협조하게 만들어 사태가 더욱 심각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산간 지역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마을에서는 국군과 빨치산의 강압적 영향이 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고 주민들은 양쪽의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추는데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거창군 신원면 또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국군은 사건 발생 두 달전인 1950년 12월 5일에 400~500명의 빨치산이 신원면의 한 국군 지소를 습격해 이듬해 2월 7일 국군이 진주할 때 까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3대대는 거창양민학살에 앞서 2월 8일에 산청군, 함양군 등에서도 705명의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것으로 훗날 밝혀졌고 결국 해외 외신들이 이 사건들을 사진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대한민국 역사에 커다란 상처가 드러나게 되었다.

1899년 2월 3일 미국 필리핀 전쟁 발발

1899년에서 1902년까지 미국과 필리핀의 전쟁이 일어났다. 1896년 이후 스페인에서 독립을 위해 싸운 필리핀 사람들은 1896년 6월 12일에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1898년 12월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필리핀의 독립을 도왔으면서도 파리조약에서 2,000만달러로 필리핀을 매입하여 자국의 식민지로 삼으려고 했다. 1899년 1월1일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필리핀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마로로스 의회를 조직해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미국에서 8월14일 1만1000명의 지상군을 필리핀으로 보내 필리핀을 점령하려 했다. 미국은 필리핀 침략에 대항하는 필리핀 사람들 60만명을 잔혹하고 극악하게 학살했다. 그렇게 미국은 필리핀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 전쟁은 1902년 7월 4일에 끝났으며 이 전쟁으로 인해 100만명이 넘는 필리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군인들과 다른 저항군들은 1913년 미국이 통치를 끝낼 때 까지 미국의 침략에 끝까지 저항했다. 당시 전투를 지휘하던 스미스 장군은 필리핀 게릴라에게 피해를 입자 격분해 '열살이 넘은 모두를 죽여라!' 라고 명령을 내렸고 체포된 죄수들 중에서도 10살 이상 모두는 처형되고 말았다. 그렇게 필리핀에서는 수 십 만명의 민간인들이 미군에 의해 희생되었고 이후 스미스 장군은 미국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별도의 처벌없이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