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최의 행복한 쉼터 - 길

소셜 워커로 일하고 있는 미국인 친구 신시아로부터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몬트레이의 마리나 바닷가에서 일주일간 지낼 수 있는 호텔을 예약하여 전액을 대불해 준 것이다. 꿈 같은 시간들을 보내고 일터로 돌아온 지금에도 하얀 파도를 가르는 바다와 코끝에 스민 신선한 해초 내음은 큰 능력이 되어 눈 앞에 쌓인 일거리들이 힘들기는 커녕 즐겁게만 느껴진다. 부서진 물보라를 따라서 총총 걸음을 하던 작은 새들의 행진이 저녁 노을에 어우러진 절묘한 조화는 말그대로 환희였다.

이 멋진 겨울 휴가를 함께 누린 친구는 모두 다섯 명이었다. 직업도 각기 달라 발휘한 재능으로 우린 정말 깨알 같은 재미를 누렸다. 평소 어디를 가든지 잘 먹어야 한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는 우리는 유명한 식당의 요리사로 일하고 있는 친구의 손맛에 황홀함을 감출 수가 없었고, 행여 절제 못하여 배탈이 날 세라 혹은 넘어져 다리라도 부러질까봐 세심하게 살펴주는 의사 친구를 믿어 맘놓고 뛰어 놀았다. 나이를 잊은 아줌마들의 해맑은 모습들의 순간에 집중한 사진작가 친구의 작품은 큰 즐거움이었으며, 평소 굳건하게 지킨 품위를 내던지고 자유로움 그 자체를 만끽하느라고 여기저기 벗어놓은 옷가지들과 과자 봉지를 기꺼이 즐거움으로 정리해준 착한 친구로 인해 청결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그렇다면 정작 나는 무엇을 했는가 묻는다면 나름 중요한 설거지를 담당했다고 말한다. 끼니때마다 싱크대에 쌓여 있는 그릇들을 기쁨으로 닦고 또 닦는 재미도 제법 쏠쏠했다. 마음에 묵혀있던 찌꺼기까지 흐르는 물에 깨끗이 흘려 보낸다고 생각하니 절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게 되었다.

코드가 딱 맞아 떨어진 우리는 매일밤 찬란한 별을 바라보며 온탕과 수영으로 불어난 몸매를 잡아주었고 낮에는 모래 사장을 걷고 달리며 체력 단련에 전심을 다했다. 처음에는 숨이 차서 쓰러질 것 같았지만 일주일이 되가니 모래 위를 달리는 것이 구름 위를 걷는것 처럼이나 가뿐하게 느껴졌다. 여행은 바로 이 맛인 것 같다. 어느덧 두고온 가족도, 해결해야 할 고민 거리도 다 잊었다. 앞으로 살아갈 2019년 새해의 불투명한 염려까지도 오히려 자신만만해졌다. 이런 휴식이야말로 삶의 면역 보강을 위한 백신 치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을 떠나기 전날 우리는 아쉬움을 안고 모래 언덕길에 올랐다. 소금기를 먹고 자란다는 선인장이 즐비하다. 이슬과 바람만을 먹고 생존한 풀들은 어쩜 그리도 싱싱하고 강한지 신기하기만 했다. 오로지 사람의 발자국만으로 만들어진 선인장 길을 걷던 중 무심코 힘들게 밟아온 길을 뒤돌아 보게 되었다. 아주 좁은 길이었기에 중심을 잡고 걷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을 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오솔길 같은 S자 길에서 뜬구름 없이 내가 걸어온 인생의 발자국이 클로즈업 되어 다가왔다. 결코 정로를 걷지 못하고 살았던 흔적이다. 아름다운 여행지에서 왜 하필 어울리지도 않게 완전하지 않은 세금보고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진 않지만 나는 큰 숙제를 안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했다. 쫓지 않고 서지 않고 앉지 않아야 되는 이 양심의 문제 앞에서 이미 오랫동안 주저않아 버려 앉은뱅이가 된듯한 내 모습. '아는 것보다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어느 책자의 문구가 내 마음 안에서 소용돌이 친다.

에스더 최 (수필가)
KTVN TV Reporter 역임
SF Koreadaily News Reporter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