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연의 그림과 함께하는 수필 - 비내리는 가을에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여름 내내 먼지가 한가득 쌓여 있든 지붕도 미처 거두지 못한 거미줄이 걸려있는 진회 색빛 벽도 왠지 초조한 내 마음도 다 축축해진다. 가을이 익어가면서 단풍도 익어가고 사랑도 그리움도 익어가고 덩달아 나도 익어가고 있다. 비가 오는 목요일 오후, 차를 타고 먼 길을 나섰다. 가을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급히 가방을 챙겨 떠나는 길이다. 북쪽으로 끝없이 올라가며, 언뜻 스쳐 지나가는 전혀 모르는 시골 동네의 고적한 골목길에서, 작고 낡은 오래된 대문 앞에 놓인 여러 주홍빛깔의 크기가 다른 호박들과 노란빛의 국화 화분들을 바라보며 그냥 가슴이 설레인다.
왜 가을은 이렇게 작은 것조차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며칠이 지나야 살던 곳으로 돌아갈 거라는 초조함이 더해져, 얼른 집으로 돌아가 나도 대문 앞을 온통 가을 색상으로 장식할 거라며 마음이 서둔다. 비가 내리며 더없이 깨끗하게 씻겨져 내린 나무들의 아름다움을 더 는 참을 수 없어 차를 세우고, 길 한 켠에서 올려다보는 가을의 단풍들은 마치 그림엽서 속 모습으로 나란히 긴 줄을 서 있다. 처음에는 약간 수줍은 듯 겁먹은 듯, 옅은 노란색으로 시작한 장난이 어느새 신이 난 듯 점점 더 짙게 칠해지면서, 드디어 주홍색에 빨간색까지 덧칠하며 온통 물감 놀이 중이다. 이 멋진 색상들을 미처 보지 못했다면 아마 난 정말 가을의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였을 거라는 생각에, 게으름으로 망설인 나를 억지로 끌고 함께 떠난 이들에게 감사해한다. 비록 집 떠난 고생의 첫날은 생각지 못한 추위에 떨었었고 어떤 저녁은 배를 굶으며 맥주 한잔으로 잠들었지만 그래도 뜻하지 않은 가을을 만났었고 설레였다.

이제는 돌아와 이 가을을 과거형으로 바꾸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떠나는 것은 아주 아쉽고 다시 돌아오는 것은 참으로 반갑다. 떠나지도 돌아오지도 않은 체, 언제나 변함없이 늘 곁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함께 가고 있는 - 무덤덤한 사랑의 표현조차도 제대로 못한 - 오랜 세월 지켜주는 벗들과, 이렇게 비가 오며 가슴 설레며 시린 가을과, 짙은 색깔의 화려한 단풍과, 여러 주홍빛깔의 호박들과 노란 국화들을 배경으로 마음속 사진을 찍으며, 또하나의 잊지 못할 추억으로 인생 사진첩에 가지런히 붙여 놓는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