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역사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

1929년 11월 3일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독립운동으로 기록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시작된 날이다. 광주와 나주를 오가는 통학 열차 정류장에서 일본인 중학생들이 광주 여고생의 댕기머리를 잡아 당기며 희롱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목격한 여학생의 사촌 동생이 하자 말라며 따졌고 일본 학생들이 한국 남학생을 때리기 시작했다. 이를 본 한국 학생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싸움이 벌어졌는데 결국 일본 경찰이 일본 학생들을 편들면서 한국 학생들을 구타했고 이것이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 이 사건이 벌어진지 4일 뒤인 11월 3일, 일본 메이지 천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치절 행사에 학생들은 기념식 내내 침묵으로 저항했고 이에 한일 학생간의 언쟁이 벌어지면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에 일본의 식민지 교육은 받을 수 없다며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학생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는 멈추지 않고 2차, 3차에 걸쳐 계속 일어나 두달 뒤 전국의 온 학생이 모두 들고 일어나는 저항운동이 되었다. 이때 시위에 참여한 학교만 194개로 5만4천여명의 학생들이 시위 운동을 벌였고 약 천여명의 학생들이 감옥에 갇혔다. 또 580여명이 퇴학을 당했고 2천여명이 무기 정학을 받았는데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최대의 민족 운동이었다.
그리고 1953년부터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을 기념하는 의미로 11월 3일을 '학생의 날' 로 지정했다.

1970년 11월 13일, 노동운동가 전태일 분신자살

1970년 11월 13일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던 전태일이 자기 몸에 불을 지르고 분신 자살했다. 그는 화염속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라고 외치며 죽어갔다. 전태일은 대구 출신으로 가난 때문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이 파산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청계천에 있는 평화 시장의 한 공장에서 봉제 노동자로 일했다. 당시 전태일이 일하던 평화시장은 의류상가와 제조업체가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1층은 상가로 사용되었고 2-3층은 500여개의 제조업체가 모여있었다. 공장들은 모두 영세한 규모였는데 너무 작은 공간에서 적게는 10여명 많게는 50여명이 일했다. 이곳의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형광등 불빛에 의존해 하루 14시간씩 일을 했으며 환기 장치가 없어 폐질환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그는 이렇게 열악한 노동 현실을 보며 끔찍한 노동 현실을 세상에 알리고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고 결국 노동 환경을 개선하고 노동법을 지키라고 주장하면서 분신 자살했다. 이후 전태일의 어머니가 병원에서 아들의 주검을 지키고 있을때 정부에서 작은 빌딩을 한 채 살 수 있을만한 현금을 싸 들고 찾아와 조용히 장례를 치를 것을 요구했고, 그녀는 돈다발을 관리들의 얼굴에 집어 던지며 아들의 뜻이 이뤄질 때까지 온몸으로 싸울 것을 맹세했다. 그의 희생은 이후 노동 운동의 발전과 함께 근로 환경 개선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82년 11월 14일, 프로복서 김득구의 마지막 경기

1982년 11월 14일 미국 라스베가스 시저스팰리스 호텔에 마련된 특설링에서 WBA(세계권투협회) 라이트급 타이틀 매치가 벌어졌다. 출전 선수는 대한민국의 프로복서 김득구 선수와 챔피언 레이 붐붐 맨시니 선수였다. 김득구 선수는 한국 챔피언에 이어 동양 챔피언의 타이틀을 가진 아시아의 떠오르는 복서였다. 맨시니는 흑인들이 챔피언을 독점하던 미국 권투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백인 스타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스타 복서였다. 경기는 13라운드까지 난타전이었는데 10라운드에서부터 김득구의 체력이 딸리며 그로기 상태로까지 몰리기도 했다. 그리고 14라운드 김득구가 판정으로는 가망 없다는 듯 탱크처럼 몰고 나왔지만 맨시니의 강력한 레프트 훅과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턱에 맞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게 김득구의 마지막이었다. 의식을 잃은 김득구는 급히 데저트 스프링스 병원으로 옮겨져 긴급 뇌수술을 받았지만 4일뒤 병원에서 사망했다. 당시 나이 26세. 그는 동양계 미국인들에게 장기를 기증하고 떠났다. 그의 죽음으로 세계 복싱계는 거센 논쟁에 휩싸였고 경기를 12회로 줄이고 스텐딩다운제를 도입하는 등 선수를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했다. 이후 김득구의 모친은 3개월 뒤 유서를 쓰고 아들의 뒤를 따라갔으며 경기 심판이었던 리처드 그린 또한 선수가 위험한 상태에서 계속 경기를 끌어간 자책감으로 7개월 뒤 자살했다.

2008년 11월 26일, 인도, 연쇄 테러로 약 480여명 사상자 발생

2008년 11월26일 인도의 경제, 금융 중심지인 뭄바이 시내에서 연쇄 테러가 발생했다. 테러범은 10인조 청년 테러집단으로 이들은 뭄바이 시내 최고급 호텔인 타지마할 호텔과 오베로이 호텔, 카페, 기차역, 경찰서, 병원, 유태인 거주지 등 10여곳을 습격하여 동시다발 총격과 수류탄등을 사용해 폭발을 일으켰다. 이 테러로 인해 약 188명이 사망하고 249명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테러 발생 직후 인도 국가안보경호국(NGS) 특수부대는 범인 9명을 현장에서 사살하고 파키스탄 출신의 21세 테러범을 생포했다. 추후 생포된 테러범은 이잘 모하메드 아미르 카스브로 파키스탄 펀자브주 출신이며 파키스탄의 이슬람 테러조직인 '라시카르이 타이바(경건한 자들의 군대)' 소속으로 밝혀졌다. 이 테러로 인도 수뇌부는 파키스탄에 책임을 물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의 양국 관계가 악화되었다. 1993년부터 뭄바이에서 테러로 희생된 사람은 약 700여명으로 집계되었는데 뭄바이가 테러의 중심이 된 이유는 힌두교와 무슬림의 종교갈등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만연한 부정 부패와 빈부격차도 잦은 테러의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2010년 11월 22일, 캄보디아의 축제 현장에서 378명 압사 사고

2010년 11월 22일 캄보디아 최고의 축제인 '물의 축제' 에서 378명이 사망하고 75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20일에서 22일까지 3일간 열린 '물의 축제' 에는 약 200만명이 참가했는데 밤 10시경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보트 경기를 구경하기 위해 대규모의 인파가 몰렸고 다리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밀다가 중간에 있던 사람들이 실신해 쓰러지면서 사고가 벌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캄보디아의 '물의 축제'는 긴 우기가 끝나는 것을 축하하는 행사로 설날과 함께 가장 큰 최대의 명절로 꼽힌다. 해마다 메콩강의 수위가 낮아지는 10월말이나 11월에 3일동안 열리는데 1,000년이 넘는 유래를 가지고 있을 만큼 국왕까지 직접 나와 참가할 만큼 가장 화려하고 중요한 축제인데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라는 뜻에서 감사의 마음으로 축제를 열고 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캄보디아의 수도인 프놈펜에서 수백 척의 배들이 경기를 하는 것으로 이 날 역시 이 경기를 보기 위해 몰린 대규모의 인파속에서 발생해 더 큰 피해가 발생하게 되었다. 캄보디아 정부는 사망자에게 장례비로 500만리엘(약 140만원), 부상자에게는 100만리엘(약28만)원을 지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