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연의 그림과 함께하는 수필 - 약속

캔버스 앞에 앉았다. 아무 것도 없는 텅빈 캔버스 앞에서 무엇으로 그릴까 하는 생각에 잠시 머뭇거린다. 화려한 색감으로, 저 밑바닥 아래 감춰있는 속마음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즐기는 난, 가끔은 유화로 또 아크릴화로 많은 색들을 꺼집어낸다. 기름으로 묽게하여 두껍고 깊은 질감이지만 잘마르지 않아 오랜 시간의 덧칠이 필요한 유화와, 물로 섞어서 간편하게 금방 마르면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많은색을 원하는대로 빨리 편하게 쓸수있는 아크릴화이다. 그렇지만 요즈음은 무엇이든 그자리에서 바로 알아야하고, 또 빨리 보고싶어 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에 서두른다. 느긋하게 그 과정 안에서 가지는 즐거움과 깊은 맛을 잊어버린 것이다.

"인간시장"의 작가 김홍신이 최인호 작가와의 생전의 약속으로 온 손가락 마디마디의 고통을 감수하며 여전히 펜으로 소설을 집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소설의 긴 집필 과정을 컴퓨터로 쓰면 편하고 쉬울 것인데도 굳이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공했고 많은 연륜을 쌓은 작가이면, 누가 그 고집을 일부러 묻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스스로 지켜야할 것은 힘들어도 품고, 또 포기할 것은 버리고서 가야한다는 신념때문에 여전히 펜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이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지켜가는 사람이 많으니 세상은 또 아름다운 것일 거다.

모든 일들이, 쉽게 온 것은 쉽게 간다는 거 잘 안다. 오래전 어렵게 그림을 다시 시작하며 했던 처음 나와의 약속 그대로 "지킬 것은 지켜가며, 그림도 그리고 또 세상도 살아야지요" 라고 중얼거리면서, 뒷켠에 묵혀 두었던 유화물감을 한가득 꺼내어 오래된 커다란 파렛트위에 아주 듬직하니 마음껏 짜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