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연의 그림과 함께하는 수필 - 서울 이야기

늘 서울에 서운하다.

나만 그리워하는데 나 없이도 잘살고 있는 서울이 얄밉다. 세상은 나 하나쯤 신경 쓰지 않아도 잘 흘러가는데, 스스로가 남겨두고 떠났으면서 되레 얄미워하고 서운해한다. 마음이 무엇이든, 바보처럼 아직도 못잊어하며 사랑하고 있다는 거다. 서울의 날씨는 뜨거운 여름을 떠나보내기 싫었는지 가을인데도 30도를 넘기고 있다, 문득 축축한 비가 내린다. 습도 높은 가을비 오는 높디높은 아파트들이 하늘을 덮고 있는 압구정 앞길에서, 빨강 신호등에 걸려 쳐다본 길가의 가로수에 이름 모를 열매가 맺혀있다. 차 창문을 열고 고개를 빼고서 자세히 챙겨본 먼지투성이의 나무는,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을 짙은 갈색 동그란 모양의 열매를 한가득 불린 채 서있다. "아니 쟤는 왜 그곳에서 뭐 하려고 서 있는거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으로 웃음이 나왔다. 비록 먼지로 뒤덮은 거뭇한 색상일지라도 더없이 높고 화려한 아파트쯤은 아랑곳없이, 복잡한 압구정 길가에 뚝심 좋게 지키고 있는 모습이 기특하고 이쁘다. 내가 있는 곳에서 잘 적응하고 열매 맺으며 자신의 몫은 한다는 것이다.

추적이는 가을비가 내리지만 날 만나러 와준 친구들과의 만남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지키며 살고있는, 선한 그대로의 모습으로 마치 어제 만난 거처럼 웃으며 이야기하고 무심한 듯 반긴다. 39살에 혼자되어 세 남매를 멋지게 기른 이쁜 숙이와 늦은 그림 공부의 열정으로 1년을 붙들고서 완성한 300호의 커다란 작품을 보여준 영희와 남편의 사업 실패로 힘든 그러나 열심으로 지키며 살고 있는 제일 사랑하는 그 애와 그리고 세상 무난하고 편한 그러나 날 위해 2시간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은 초등학교 친구 - 모두는 진심 고마웠고 사랑이었다. 깜깜해진 밤, 헤어져 돌아오는 길 갑작스레 심하게 내리는 빗속 강남 길가에 막무가내로 멈춰버린 차 안에서, 나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무엇으로 어떻게 지켜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침에 보았던 길가의 나무 열매가 생각났고 방금 헤어진 친구들이 떠올랐다. 무어 그리 서운해하고 그리워하며 얄미워하는지 다 의미 없다. 그만큼 사랑하고 있고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 나라 나의 자리에서 열심히 긴 세월을 잘 버티며 적응하고 살다, 어느 날 커다란 가방 챙겨서는 서운함으로 아린 서울을 만나러 오면, 그것 또한 멋진 다른 삶일 거라 오늘 밤 돌아본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