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역사

1982년 11월 14일, 프로복서 김득구의 마지막 경기

1982년 11월 14일 미국 라스베가스 시저스팰리스 호텔에 마련된 특설링에서 WBA(세계권투협회) 라이트급 타이틀 매치가 벌어졌다. 출전 선수는 대한민국의 프로복서 김득구 선수와 챔피언 레이 붐붐 맨시니 선수였다. 김득구 선수는 한국 챔피언에 이어 동양 챔피언의 타이틀을 가진 아시아의 떠오르는 복서였다. 맨시니는 흑인들이 챔피언을 독점하던 미국 권투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백인 스타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스타 복서였다. 경기는 13라운드까지 난타전이었는데 10라운드에서부터 김득구의 체력이 딸리며 그로기 상태로까지 몰리기도 했다. 그리고 14라운드 김득구가 판정으로는 가망 없다는 듯 탱크처럼 몰고 나왔지만 맨시니의 강력한 레프트 훅과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턱에 맞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게 김득구의 마지막이었다. 의식을 잃은 김득구는 급히 데저트 스프링스 병원으로 옮겨져 긴급 뇌수술을 받았지만 4일뒤 병원에서 사망했다. 당시 나이 26세. 그는 동양계 미국인들에게 장기를 기증하고 떠났다. 그의 죽음으로 세계 복싱계는 거센 논쟁에 휩싸였고 경기를 12회로 줄이고 스텐딩다운제를 도입하는 등 선수를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했다. 이후 김득구의 모친은 3개월 뒤 유서를 쓰고 아들의 뒤를 따라갔으며 경기 심판이었던 리처드 그린 또한 선수가 위험한 상태에서 계속 경기를 끌어간 자책감으로 7개월 뒤 자살했다.

1860년 11월 6일 링컨 대통령으로 당선

1860년 11월 6일 링컨이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링컨은 현재도 가장 존경받는 미국의 대통령으로 꼽히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롤모델로도 잘 알려져 있다. 게다가 2012년 링컨 이라는 영화로 그의 리더십이 부각되면서 다시 한 번 전 세계는 링컨 열풍에 휩싸였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 그의 인생은 파란 만장 했다. 그는 우체국장, 뱃사공, 측량 기사 등의 직업을 전전하다가 사업에 실패했다. 그 후 일리노이주 의원 선거에 도전했지만 낙선했고, 간신히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주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링컨의 고난은 계속됐다. 주의원 의장에 낙선, 하원 의원 공천 탈락, 상원 의원 낙선, 부통령 후보 경선에서 낙선등 그의 정치 경력에는 낙선한 사례가 많다. 1858년에는 대통령이 되기 직전에 상원의원 선거에서도 출마 했다가 낙선한 바 있다. 1860년의 링컨은 민주당이 남부와 북부 민주당으로 갈라지면서 어부지리로 당선됐다. 미국 선거 역사상 유일하게 당선자의 득표율이 40%가 넘지 않은 선거였다. 하지만 그 후 링컨의 업적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눈부신 것이었다. 그는 분열된 국가를 통합하고 노예를 해방 시켜서 미국 최고의 대통령으로 기억되 고 있다. 여러 번의 도전과 낙선 끝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그는 미국의 역사를 바꾸며 큰 업적을 남긴 대통령으로 기록 되었다.

1968년 울진과 삼척에 무장공비 1백여명 침투

1968년 11월2일 무장공비 1백여명이 울진과 삼척 지구에 침투했다. 이들은 북한 민족 보위성 정찰국 예하의 124군 부대 소속으로 청화대 습격을 목적으로 서울로 침투했던 김신조 사건을 만회하고 남한에서 반정부 민중 보기를 일으킬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무장공비들은 기관단총과 수류탄을 들고 10월30일부터 11월 2일 사이에 15명씩 8개조로 나뉘어 총 120명이 침투했고 울지, 삼척, 봉화, 명주, 정선등의 주민들을 집합시킨 다음 북한 책자를 나누어 주면서 북한 발전상을 선전하는 한편 인민유격대에 가입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11월3일 울진 북면 고수동 주민이 울진 경찰서에 무장공비 출현을 신고하였고 상황을 파악한 당국은 11월3일 오후 2시30분을 기하여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 '을종사태' 를 선포하고 대간첩 대책본부의 지휘 아래 군과 향토 예비군을 출동시켜 소탕작전을 벌였다. 이 전투로 인해 침투한 무장공비 중 7명이 생포되고 113명이 사살되었으며 남한측도 민간인을 포함하여 40여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넘게 부상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2008년 11월 26일, 인도, 연쇄 테러로 약 480여명 사상자 발생

2008년 11월 26일 인도의 경제, 금융 중심지인 뭄바이 시내에서 연쇄 테러가 발생했다. 테러범은 10인조 청년 테러집단으로 이들은 뭄바이 시내 최고급 호텔인 타지마할 호텔과 오베로이 호텔, 카페, 기차역, 경찰서, 병원, 유태인 거주지 등 10여곳을 습격하여 동시다발 총격과 수류탄등을 사용해 폭발을 일으켰다. 이 테러로 인해 약 188명이 사망하고 249명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테러 발생 직후 인도 국가안보경호국(NGS) 특수부대는 범인 9명을 현장에서 사살하고 파키스탄 출신의 21세 테러범을 생포했다. 추후 생포된 테러범은 이잘 모하메드 아미르 카스브로 파키스탄 펀자브주 출신이며 파키스탄의 이슬람 테러조직인 '라시카르이 타이바(경건한 자들의 군대)' 소속으로 밝혀졌다. 이 테러로 인도 수뇌부는 파키스탄에 책임을 물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의 양국 관계가 악화되었다. 1993년부터 뭄바이에서 테러로 희생된 사람은 약 700여명으로 집계되었는데 뭄바이가 테러의 중심이 된 이유는 힌두교와 무슬림의 종교갈등 뿐 아니라 사회전반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도 잦은 테러의 원인으로 지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