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역사

1909년 10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일본 제국의 전 총리이며 제1대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그가 수행원의 안내를 받으며 러시아 군대 앞을 막 지나가는 순간 안중근이 저격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명중시켰고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안중근은 체포되면서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 30분뒤 오전 10시에 사망했다. 이후 안중근 의사는 만주 뤼순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았다. 안중근은 일본 법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 이므로 개인자격이 아닌 대한의군 사령관으로서 처형하였다.” 고 밝힌 뒤 사형을 선고받았고 항소를 포기하며 죽음을 선택 전체를 통틀어 매우 독특했던 왕비로 전해진다. 권력에 적극적인 참여로 고종이 국정을 의논하는 가장 가까운 상대였고, 외국의 세력들 또한 고종보다 더 주시했던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다. 온갖 풍파 속에서 목숨마저 위협받는 일들이 일어나면서 황후는 권력에 더 지나치게 집착했고 궁궐에서 굿을 하거나 국고를 낭비하는 비이성적인 모습도 보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개인사를 떠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우리의 국격이 훼손된 끔찍한 역사속의 일로 남겨졌다.
했다. 안중근이 마지막으로 남긴말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였다. 하지만 뤼순 감옥 뒷산에 묻힌 그의 유해는 지금까지도 찾지 못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현재에도 세계사에 울림을 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삼일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의거 독립군 활동에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되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라 불리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다. 명성황후 민씨는 경복궁에서 조선 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아래 일본군 경성수비대에 암살되었다. 당일 흉도들은 명성황후의 처소를 찾기 위해 궁녀들을 폭행하고 윽박질렀지만 궁녀들은 신음조차 내지 않았고, 건청궁 동쪽 곤녕합에서 황후를 찾아냈을 때 궁내부 대신이 황후를 가로막고 나서다가 권총과 칼에 무참하게 살해된다. 그리고 궁녀와 상궁들 사이에서 변복한 황후를 찾아내어 처참하게 시해했다. 또 궁내부 대신들과 궁녀들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사건직후 미우라는 황후 시해 사건을 조선인의 반란으로 호도하는 공작을 폈으며 외부에 공문을 보내고 조선 외부와 군부의 입을 통해 일본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거짓 증명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후 황후는 폐위까지 되지만 황후의 복위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복수를 외치는 의병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고, 일본 공사가 조선의 국모 시해사건의 주모자였음이 밝혀졌다.명성황후는 한국사

1871년 10월 8일 시카고대화재

시카고가 정식 시로 탄생된 해는 1837년으로 당시의 인구는 4200명 수준이었다.이후 발전을 거듭하던 시카고는 34년이 지난 1871년 10월8일부터 사흘간 19세기 최악의 피해를 끼친 재해 중 하나인 시카고 화재가 일어났다. 이 화재의 불길은 그날 따라 극도로 건조했던 날씨와 시카고 명물인 거센 바람에 휘말려 무려 27시간동안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통에 다운타운과 북쪽 의 전 지역을 잿더미로 폐허화시켰다.단 하룻밤의 화재로 대부분이 목조건물이었던 빌딩 중 1만8천호가 소실되어 당시 시카고 인구의 3분의1에 해당하는 10만명이 집을 잃었다.이 화재로 인해 300명이 사망하고 당시 화폐가치로 2억달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재산피해도 났다. 그러나 시카고는 이 대화재 사건을 전화위복으로 삼아 오히려 잿더미에서 기적을 일으키며 힘차게 일어섰다. 시카고의 자랑인 다운타운의 유명한 건축물들 이 이때부터 세워지기 시작했다.

1956년 10월29일 대한민국 첫 패션쇼가 열리다.

1956년 10월29일 패션디자이너 노라노(본명 노명자) 가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다. 패션쇼는 서울 반도 호텔(현 롯데호텔) 에서 열렸는데 여류 소설가 김말봉이 사회를 보고 영화 배우 최은희, 조미령 등이 모델로 등장하는 등 당시 최고의 이벤트로 기록되었다. 또 단골 손님들에게 출품된 옷을 싼값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모델을 부탁했고 10명의 손님들이 흔쾌히 모델로 자원하여 패션쇼가 완성되었다. 이들은 10일 정도 워킹 연습을 했고 의상은 모델 1인당 총 6벌로 총 60벌의 옷을 선보였다. 출연 모델들은 생전 처음 해보는 일에 긴장하여 워킹 중 넘어질 뻔한 일도 있었고 양장에 익숙하지 않던 시절이라 뒷 단추 옷이나 스커트의 앞뒤를 바꿔 입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노명자는 17세의 나이에 일본군 대외와 결혼했고 얼마 후 이혼한 뒤 미국 LA 로 건너가 프랭크 웨건 테크니컬 컬리지에서 디자인을 배운 제 1세대 패션 디자이너다. 이날 선보인 옷들도 고려 모직이 국내 최초로 생산한 모직을 소재로 노라노가 만든 것이었다. 노라노는 이후 1964년 하와이 ‘아라모아나 빌딩’ 에서 한국 패션디자이너로는 처음으로 쇼룸과 패션쇼를 열었고 이를 눈여겨본 미국 뉴욕의 Sacks Fifth Avenue 백화점에서는 그녀의 옷 350벌을 주문하기도 했다. 또 1979년에는 미국 최고의 백화점 중 하나인 MACY’S 백화점 1층의 15개 쇼윈도 전체를 노라노 컬렉션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1904년 10월27일 뉴욕의 첫 지하철 개통

1904년 10월27일 뉴욕에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지하철 개통식을 보기 위해 이날 뉴욕 시청 주변에는 6천여명의 군중이 모였고 뉴욕 시민들은 기차와는 다른 지하철이 시청에서 할렘가 까지 15분만에 주파하는 것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뉴욕의 첫 지하철은 4년 7개월 만에 탄생했다. 당시 뉴욕 시청에서부터 145가까지 운행했던 뉴욕 지하철은 현재는 총 722마일 구간에 469개 역을 잇는 세계 최장의 지하철이 되었으며 하루 평균 이용객만 35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미국 최초의 지하철은 뉴욕보다 6년 앞선 보스턴 지하철이며 세계 최초의 지하철은 영국 런던으로 1863년 증기기관차를 이용해 만들어져 운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