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역사

1927년 2월 16일 국내 첫 라디오 방송 송출

"여기는 경성방송국 입니다. JODK."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방송이 처음으로 송출되었다. 전파 발사는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현재의 덕수초등학교 자리였고 호출 부호는 JODK, 호출 명칭은 경성방송국, 주파수 690kHz 였다. 방송 시간은 오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총 17시간 이었지만 장비부족, 인력 문제로 인해 방송은 늘 불규칙하게 송출되었다. 개국 초기에는 한일 양국어로 방송되었는데 한국어 30%, 일본어 70% 의 비율로 방송되다가 1933년 조선어 방송인 연희방송소가 개소된 후 일본어 방송을 제1방송, 한국어 방송을 제2방송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처음 개국한 경성방송국에는 한국인 직원이 3명 포함돼 있었는데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이 프로듀서 1호였고 그의 부인 마현경이 아나운서1호였다. 정규 라디오 방송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6번째로 이뤄진 일이었지만 국권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의미 없는 기록으로 남겨졌다. 당시 라디오 청취료는 월 2원이었는데 쌀 한 가마니 가격이 5원이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꽤 고가의 청취료였다. 사실 일본 정부가 조선인의 집단 행동을 통제하고 민족의 정신 개조를 통한 황국신민화를 목적으로 개국한 것으로 조선 민중을 위한 방송 시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총독부의 불허로 이뤄지지 않았다.

1958년 2월 16일 대한민국 최초 여객기 KNA '창랑호' 피납

대한민국 최초의 여객기 창랑호는 대한국민항공사의 여객기다. 1958년 2월 16일 오전 11시 30분, 창랑호는 부산 수영비행장을 이륙 여의도 공항을 향하고 있었다. 창랑호는 도착을 눈앞에 두고 12시 40분경 평택 항공에서 기수를 돌려 북으로 강제 납북되었다. 이 사건은 5명의 남파 공작원과 2명의 월북 동행자가 합작하였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항공기 공중 납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양 순안 국제공항에 강제 착륙한 창랑호에는 승무원 3명 승객 28명 납치범 7명등 총 38명이 타고 있었으며 기장과 부기장 모두 미국인이었고 독일인 부부 등 외국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1899년 2월 3일 미국 필리핀 전쟁 발발

1899년에서 1902년까지 미국과 필리핀의 전쟁이 일어났다. 1896년 이후 스페인에서 독립을 위해 싸운 필리핀 사람들은 1896년 6월 12일에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1898년 12월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필리핀의 독립을 도왔으면서도 파리조약에서 2,000만달러로 필리핀을 매입하여 자국의 식민지로 삼으려고 했다. 1899년 1월1일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필리핀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마로로스 의회를 조직해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미국에서 8월14일 1만1000명의 지상군을 필리핀으로 보내 필리핀을 점령하려 했다.
미국은 필리핀 침략에 대항하는 필리핀 사람들 60만명을 잔혹하고 극악하게 학살했다. 그렇게 미국은 필리핀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전쟁은 1902년 7월 4일에 끝났으며 이 전쟁으로 인해 100만명이 넘는 필리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군인들과 다른 저항군들은 1913년 미국이 통치를 끝낼 때 까지 미국의 침략에 끝까지 저항했다. 당시 전투를 지휘하던 스미스 장군은 필리핀 게릴라에게 피해를 입자 격분해 '열살이 넘은 모두를 죽여라!' 라고 명령을 내렸고 체포된 죄수들 중에서도 10살 이상 모두는 처형되고 말았다. 그렇게 필리핀에서는 수 십 만명의 민간인들이 미군에 의해 희생 되었고 이후 스미스 장군은 미국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별도의 처벌없이 은퇴했다.

1951년 2월 11일 거창양민학살사건 발생

1951년 2월11일, 6.25라는 혼란속에서 수백명의 거창군 양민들이 학살되는 참극이 발생했다. 1.4후퇴가 시작되면서 빨치산 대공세가 강화되자 거창군 신원면의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 일대에서 공비 토벌 작전 중이던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무고한 부락 주민 719명을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내탄 부락과 박산 계곡에서 무참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대규모의 정규군의 투입에도 빨치산 토벌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빨치산들은 험준한 산악 지대를 근거로 전세에 따라 수시로 기습과 퇴각을 하면서 토벌군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또 작전 지역안에서는 민간인을 상대로 약탈, 부녀자 폭행, 살상등의 민간인에 대한 국군의 만행이 이어졌고 일대 주민들로 하여금 빨치산의 활동을 묵인 방조하거나 협조하게 만들어 사태가 더욱 심각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산간 지역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마을에서는 국군과 빨치산의 강압적 영향이 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고 주민들은 양쪽의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추는데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거창군 신원면 또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국군은 사건 발생 두 달전인 1950년 12월 5일에 400~500명의 빨치산이 신원면의 한 국군 지소를 습격해 이듬해 2월 7일 국군이 진주할 때 까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3대대는 거창양민학살에 앞서 2월 8일에 산청군, 함양군 등에서도 705명의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것으로 훗날 밝혀졌고 결국 해외 외신들이 이 사건들을 사진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대한민국 역사에 커다란 상처가 드러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