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역사

11월 5일, 1872년 '수전 B. 엔서니' 여성 최초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하다

선거에서 자신의 한표를 행사하는 일. 지금은 남성, 여성 구분없이 당연한 일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여성이 투표할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기에 여성 최초로 투표를 하는 일은 굉장한 결단력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여성 최초로 미국 대통령 선거에 투표를 한 '수전 B. 앤서니' 는 누구일까? '수전 B. 앤서니(Susan B. Anthony)는 미국의 여성 운동가로, 미국 여성 참정권 운동을 시작한 선구자이며, 미국여성참정권협회 회장이었고,여성의 권리를 위한 주간지 'The Revolution' 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녀는 여성으로 미국 대통령 선거 투표를 했다는 이유로 100 달러의 벌금형을 부과 받았는데 당시 지불을 거부했고, 재판에서 변호사를 통해 심판은 미국이 받아야 한다며, 여성의 투표권과 여성의 사회적 평등을 위해 강력히 주장했다. 수전 B. 앤서니라는 여성 인권가의 선구적인 공헌은 지금까지도 전세계 여성의 갈채를 받고 있다.

11월 21일, 1997년 대한민국이 국제 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신청하다

"시청자 여러분, 정부가 결국 국제 통화기금 IMF 의 구제 금융을 신청하기로 했습니다. 경제 우등생 한국의 신화를 뒤로 한 채 사실상의 국가 부도를 인정하고 국제기관의 품안에서 희생을 도모해야 하는 뼈아픈 처지가 되었습니다." (MBC 뉴스 앵커멘트중) 1997년 11월은 우리 국민에게 잊지못할 아픈 역사로 남아있다.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면서 외환 보유액이 급감했고, IMF에서 195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아 간신히 국가 부도 사태를 면했던 사건이다. 동남 아시아의 연쇄적 외환위기 속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외환관리 정책의 미숙과 실패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고, 이로 인해 온국민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대한민국은 2001년 IMF 구제금융195억 달러를 조기상환하면서 IMF 관리체제를 종료시켰다.

11월 28일, 1943년 테헤란 회담

1943년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회담이 열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무렵 연합군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가 모인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 영국의 수상 처칠, 소련의 수상 스탈린이 모인 첫 회담이었다.
테헤란회담의 의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연합국 상륙작전에 대한 것 이었다. 스탈린이 주장하는 북 프랑스 상륙작전과 처칠이 주장하는 지중해 작전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고 결국 북 프랑스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했다. 총 사령관으 로는 아이젠하워가 임명 되었다. 이외에도 이란의 독립과 주권의 보전, 소련의 대 일전 참가 등이 결정되었다. 이 회담으로 3국의 전쟁 수행 협력이 한층 강화 되었으 며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세계 정세에 대해서 그려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역 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테헤란 회담의 이전에는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 총통의 세 연합국 수뇌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모여 회의를 했고 이런 결과가 카이로 선언으로 이어졌다.

11월 11일,1821년 도스토예프스키가 태어나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1월 11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그는 7남매 중의 차남이었다.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당시 러시아에서 의사는 중인 계급 정도로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3살 때 기숙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했다. 이후에는 공병학교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았지만 예민하고 병약했던 그에게 군사교육은 맞지 않았다.
이 시기 그는 문학에 빠져들어서 친구들과 습작을 평가하고 논쟁을 벌이는 것을 즐겼다. 공병학교를 졸업하고서는 임관을 했지만 문학에 전념하기 위해서 3년 만에 전역했다.
그는 첫 작품인 가난한 사람들로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하면서 전업 작가의 길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 작품들이 혹평을 받으면서 힘든일이 연속되었다. 그는 사회주의를 선봉하는 급진적 정치 모임에 참여했는데 당시 황제 니콜라이 1세가 통치하고 있던 러시아에서는 이는 엄격하게 금지된 일이었고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다.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 형 집행이 중지되고 시베리아에 유형을 가게 되었다. 그는 이 곳에서 10년을 보내면서 민중들의 삶을 체험했고 시베리아에서의 생활은 작품세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치게 되고 1866년 걸작 죄와벌을 완성하였다. 이후에도 백치, 악령 등의 작품을 쏟아냈다. 재미있는 것은 시베리아 유배 시절 악화된 지병 간질과 도박이 창작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 그의 작품 속에 간질과 도박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도박 때문에 그는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고 빚을 갚기 위해 출판사와 무리한 계약을 하여 마감에 쫓기기 일수였다. 그는 1881년 폐동맥 파열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1986년 11월 21일 이란-콘트라 스캔들이 밝혀지다

이란-콘트라 스캔들은 미국의 레이건 정부가 이란에 대해서 무기를 불법적으로 판매하고 그 이익으로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지원한 정치 스캔들이다. 그 동안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이란을 적성국가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무기 판매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콘트라 반군에 대한 지원은 당시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처음 이 스캔들이 알려진 것은 레바논 신문의 보도를 통해서 였다. 미국은 납치된 인질의 석방 대가로 이란에 무기를 공급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최초 보도가 된 시점은 1986년 11월 3일이었고 이란 정부는 이 보도를 인정하였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11월 13일 인터뷰를 통해서 이란에 대한 무기 판매를 인정하였지만 인질 석방의 대가라는 점은 부인했지만 이후 11월 21일 미해병대 장교였던 올리버 노스가 사건의 전모를 인정했고 결국 레이건은 탄핵의 위기에 몰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레이건의 인기는 크게 떨어졌다. 심지어는 탄핵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왔다. 레이건 정치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미 의회는 특별검사로 로렌스 월시를 임명하여서 사건을 수사하였고 1988년 올리버 노스를 포함한 핵심 인물들이 기소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하였다. 미국 정부는 정보 공개 거부 및 문서 파기 등 조직적인 은폐를 했고 사건이 완벽하게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1992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버지 부시는 관련자 모두를 사면하였다. 이 때문에 부시는 비판에 직면했는데 그가 레이건 정부의 부통령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