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역사
1944년 세계 2차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북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의 성공적인 상륙작전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된 날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1944년 6월6일부터 7월24일까지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영국을 중심으로 캐나다, 자유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폴란드, 노르웨이 등 8개국의 연합군과 나치 독일과의 전쟁으로,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령 노르망디 해안에서 연합군의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연합군은 13만2천명의 병력으로 38만명의 독일군과 싸웠으며 연합군은 총 10,424명의 사상자를 독일군은 11만3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군 대규모 지상병력이 영국 해협을 건너 히틀러의 독일군을 공격한 대규모 작전이었고, 유럽 탈환의 작전에 발동을 거는 최초의 작전이었다. 이미 연패로 패색이 짙은 독일의 후방을 공격한 것이었기에 독일의 패망을 확실시해준 전투이기도 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 에서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배경으로 하여 큰 흥행을 이끌기도 했다.
1987년 대한민국의 '6월항쟁' 이 시작되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4.13호헌조치' 발표 후, 6월10일을 정점으로 20여일동안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중항쟁이다. 1987년 전두환 전 대통령은 개헌논의 중지와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한 정부이양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4.13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사회 각계에서 비난 성명이 이어졌으며, 그해 5월 27일 재야세력과 통일민주당이 연대하여 형성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발족되었다. 이 국민운동본부는 6월항쟁의 구심체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에 더불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 은폐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민운동본부는 6월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했다. 이날 서울을 비롯 전국 22개 주요도시에서 수십만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참여했으며, 6만여명의 병력이 투입되었지만 항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시위는 야간시위와 철야농성으로 이어지면서 지속적 투쟁의 형태를 띠고 있었고 나중에는 150여만명의 민중이 참여하게 되었다. 유월항쟁은 민주화 열기를 단적으로 보여주었으며 제5공화국의 실질적 종말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1989년6월21일 유네스코 문맹퇴치 공로상 세종대왕상 창설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는 교육 과학 문화 등의 지적 활동 분야에서 국제 이해와 협력을 촉진함으로써 세계 평화와 인류 발전을 증진 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유엔전문기구이다. 본부는 프랑스 파리에 있고 전 세계에 걸쳐 53개의 지역 사무소와 11개의 산하 기구를 두고 있다. 이곳에 1989년 6월 21일 한국어 이름의 상이 제정되었다. 1989년 6월 21일 유네스코 집행위원회는 세계적으로 문맹 퇴치에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에 수여하는 문맹 퇴치 공로상의 이름을 '세종대왕상 (King Sejong Prize)'로 결정했다. 이는 우리 정부의 제안으로 이뤄졌으며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세종대왕상의 수상 대상은 문맹퇴치에 직접 종사한 경우, 국가 또는 지역단위의 문맹퇴치 사업에 종사한 경우, 문맹 퇴치를 위한 언론 캠페인에 종사한 경우, 문맹퇴치를 위한 교육 자재개발 및 생산 등 문맹퇴치의 공로가 있는 사람으로 매년 9월 8일 '국제 문해의 날' 공식 행사에서 시상된다. 수상자는 심사위원단의 평가 등을 바탕으로 유네스코 사무총장에 의해 선정되며 미화 2만달러와 은으로 제작된 메달, 상장을 부상으로 받게 된다.
6월 4일, 1989년 / 천안문 사태(천안문 민주화 운동)
매년 이맘때면 중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의 지식인, 유수의 단체들이 "중국정부는 '전안문 사태'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낸다. 1989년 6월 4일 중국 정부는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학생들과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해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때 벌어진 유혈참극의 희생자 수는 중국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319명, 유가족모임의 주장에 따르면 최소 3천명이다. 천안문 사태 당시 자녀를 잃은 부모의 모임인 '천안문 어머니'는 희생자 수가10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것은 정부가 의도적으로 수를 줄였고 유혈 진압후 병원으로 옮긴 중상자 상당수가 끝내 사망했으나 통계에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또한, 근거로서 사건발생 사흘 후 중국 홍십자사 대변인이 외국언론에 2천6백이라고 확인한 사실을 들었다. 천안문 사태는 4월15일 호요방 前당총서기가 사망하자 그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이 집회를 갖고 일반시민들이 동참하면서 집회는 민주화 운동으로 발전했다. 온건파인 조자양 총서기, 호계립 정치국 상무위원 측과 강경파인 양상곤 국가주석, 이붕 총리 측이 대립했으나, 강경파가 득세하자 계엄군이 이날 새벽 천안문에서 무기한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과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으며, 군의 발포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매년 천안문 사태 주기가 다가오면, 중국 정부는 천안문사태와 관련한 행사가 벌어질 경우 체제 위협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 대비를 강화해왔다. 천안문 사태 관련 인사들 대부분을 미리 가택연금하고 주요 인사와 단체를 사복경찰이 감시한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홍콩에서는 인권단체들의 주관으로 다양한 집회가 벌어진다. 1989년 직후 중국 지도부는 이 사건을 '반혁명사건'이라고 평가해왔으나, 원자바오는 기자회견 등에서는 '정치적 동란' 이라는 비교적 완화된 표현으로 사용했다. 1989년 자오쯔양 총서기는 당시 학생들의 움직임을 "애국운동"이라고 평가한 뒤 실각했으며, 장쩌민 당시 상하이 시당 서기가 중앙당 총서기직에 올랐다.
2000년 6월3일 고대 이집트 도시 발견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인근의 작은 어촌 해안에서 6km 정도 떨어진곳 수중에서 전설 속에만 존재한다고 믿었던 이집트의 고대 도시가 발견되었다. 이집트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 발굴 작업을 진행해왔던 프랑스 팀이 발견한 이 도시는 헤라클레이온 (Herakleion)과 메노우시스(Menouthis)로 1500여년 전 발생한 지진 또는 홍수로 인해 수몰된 것이었다. 해저 6~8m 지점에서 발견된 이 도시들은 신전 뿐 아니라 저택과 정원, 항만시설 그리고 거대한 조각상 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여신인 이시스의 조각상, 기원전 7세기 제26대 파라오 시대의 스핑크스상, 이집트 그리스 시대 조각의 머리 부분 등의 고대 유물들이 함께 쏟아져 나와 전 세계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나일강의 입구이자 지중해로 나가는 관문인 '알렉산드리아'가 수중 고고학의 보고가 된 그 시작은 우연하게 이루어졌다. 1960년대 중반 한 아마추어 다이버가 순백색의 아름다운 카이트바이 성채 앞 바다 속에서 오랜 시간 잠자고있던 이시스 신상을 건져냈 던 것이다. 발견된 이시스 신상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파로스 등대의 꼭대기에 장식으로 설치돼 있던 것이었다. 대 지진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역사의 유물들이 발견되자 이집트 정부 뿐 아니라 세계의 역사학자들이 흥분했고 알렉산드리아로 몰려들었으며 해저 탐사가 본격화 되었다. 수중 고고학 분야에서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프랑스 학자들 이 증명해낸 이 성과는 당시 엄청난 결과로 1921년 영국인 하워드 카터가 룩소르의 왕가의 계곡(King's Valley)에서 거둔 투탄카맨 왕의 황금 마스크 발굴에 필적하는 성과로 기록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