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만 미네타, 아시안계 최초로 미국 장관에 오른 인물
아시안계 최초로 미국 장관에 오른 인물 노만 미네타 전 교통부 장관
노만 미네타 전 장관을 산호세 페어몬트 호텔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약속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해,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시종일관 그는 따뜻하고 진솔했으며, 깍듯한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미국에서 아시안으로서 최초로 산호세 시장, 11선 하원의원, 그리고 장관까지 오를 수 있었던 남다른 능력이 무엇인지 사뭇 궁금했다.
노만 미네타 장관은 지역 주민 투표에서 월등한 지지율, 즉 60%이상의 표로1971년 산호세 시장이 되었고, 또한 아시안계로는 최초로 미 대륙에서 연방 하원의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21년간 연방 하원의원을 역임했다.
아시안계로는 최초로 미 대통령 내각의 장관 중 하나로 임명 되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 행정부에서 상공부 장관을 역임하고 조지 부시 대통령 행정부에서 교통부 장관직을 수행했다.
산호세 공항의 공식명칭은 노만 미네타 산호세 국제 공항 (Norman Y. Mineta San Jose International Airport)이다. 이처럼 인물의 이름을 딴 또 다른 공항으로는 뉴욕의 라과디아 공항이 있는데, 뉴욕의 전 시장, 피오렐로 라과디아에서 비롯되었다. 산호세 공항과 뉴욕 퀸즈의 라과디아 공항은 주민들의 존경과, 공항 건립시 주요 역할을 해온 시장들을 기리는 의미로 이름 지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그 당시 일본에서는 부모님의 모든 재산과 권한이 모두 장남에게만 상속되었기에 재정적으로 독립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살리나스시에 살고 있던 삼촌의 설탕 공장에 취직을 결심했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에서 미국으로 떠나는 배에 올랐다. 당시 영어도 미국지리도 알지 못했던 14세 일본소년은 미국에 도착했다는 소리를 듣고 배에서 내렸는데 시애틀이었다. 삼촌이 계신 살리나스로 900 마일을 걸었다. 일주일씩 공사장에서 일하며, 음식을 사먹고, 여비를 마련해 걷다가 또 돈이 떨어지면 일을 하며, 결국 살리나스 삼촌을 찾아갔다. 도착하자 삼촌은 영어를 배워야 미국에 살 수 있다며, 14세 소년을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시켰다.
노만 장관의 아버지는 6살짜리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한 그 때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가장 창피한 순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월반을 거듭했고, 교육을 모두 마칠수 있었고, 친구의 동생과 혼인을 했다.
노만 장관의 부모님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활동적이어서, 일도 열심히 하고, 자녀들 교육에 관심이 무척 많았으며, 미국의 국립공원들을 다섯 자녀들과 거의 매주 여행하며 화목한 가정을 꾸렸다. 재정적인 여유가 생겼지만, 당시 법상 외국인은 땅을 살수 없었기에, J.B. Beckham 이라는 변호사에게 의뢰하여 베컴 변호사의 명의로 산호세에 집을 구입해서 살았다. 노만 장관이 10세가 되었을때, 미 정부에 의해 일본인들은 모두 집과 삶의터전에서 강제 집단 거주지로 옮겨야 했다. 와이오밍주의 하트 마운틴(Heart Mountain) 캠프에서 생활하던중, 어머니와 노만 장관만 캠프에 남게 되었고, 어버지는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 로 가서 군인훈련 프로그램으로 일본어를 군인들에게 가르치게되었다. 몇 년 후 전쟁이 끝나자 가족이 산호세 집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집은 정직하고 똑똑한 베컴 변호사가 잘 관리해서 아주 상태가 좋았고, 베컴 변호사의 주선으로 집이 드디어 아버지 이름으로 명의 변경이 될 수 있었다. 이리 저리 이사를 다니느라 중학교 교과과정을 제대로 못배웠지만, 부모님의 적극적인 독려로 공부를 열심히 할 수 밖에 없었다. UC버클리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고, 두 아들을 두었다. 하나는 비행사고, 하나는 현재 오바마 대통령 백악관의 행정실에 근무하고 있다.
현재 부인은 다니엘라인데, 두 아들을 가진 싱글맘 스튜어디스였다. 그녀는 근무하던중 우연히 비행기에서 이혼 후 일에만 전념하던 노만 장관과 만나게 되었고, 마음이 잘 맞는 친구로 지내다 결혼 했고, 지난 23년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노만 장관과 결혼 후에도 스튜어디스 업무를 계속했고, 35년의 근속 후 몇년전 은퇴했다. 노만 장관과 그의 두 아들, 다니엘라와 그녀의 두 아들이 모두 한 가족으로 화목하게 지내오고 있다.
다니엘라의 아들, 밥이 노만 장관이 하원이던 시절 그의 워싱턴선거 사무소에서 일을 하고 싶어했었다. 그는 밥에게 어떠한 편의나 낙하산식의 채용 등을 제공 해주지 않았고, 밥은 스스로의 힘으로 응모하고 정상적이고 복잡한 경쟁을 이기며, 여러 절차를 거쳐서 노만 하원의 사무실에서 근무할수 있었다.
아시안이었던 그가 산호세 시장에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묻자, 그는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당시 그의 지역주민중 아시안이 2.5% 정도 였고, 흑인 2%, 히스패닉 15%, 나머지는 80% 정도가 백인 이었는데, 시장 선거에 노만 장관을 비롯해 총 14명의 후보가 나왔기에 경쟁이 극심했기에 오히려 월등히 60%의 득표를 얻을수 있었다고 한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의미다.
정치계를 입문하려는 후세들에게 들려줄 조언이 무엇인지 물었다. 정치계에 관심이 있다면, 일단 먼저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한 실력을 쌓아야 하며, 그런 와중에도 일정 시간은 항상 공공 서비스에 할애를 해야한다고 강조한다. 각종 커뮤니티 행사에서, 봉사 활동 등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자신이 잘할수 있고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한다. 무엇이든 성실히 노력한 만큼 돌아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와 대화를 나누며, 그의 철저한 근면성과, 바르고 청렴한 모습에 고개가 숙여졌다. 사람은 영물이라고 한다. 아무리 자신을 포장하려고해도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면 많은 사람들이 저절로 사람들의 실체를 알게된다. 그의 부모가 성실했기에 그 또한 성실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평생을 고위직에 머물러왔으면서도 인간에 대한 예의와 겸손을 잃지 않고 있음에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바람직한 정치인의 모습을 직접 본 훈훈한 하루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