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잊혀져서는 안될 우리 누이들 김군자, 이옥선, 강일출 여사

혼다의원님 안녕하세요!

저는 나눔의 집 김군자 입니다. 저는 마이크 혼다 의원님을 친동생으로 생각합니다. 멀리있어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늘 건강과 행운을 두손모아 빕니다. 그리고 가장 인간적인 미를 갖고 계시는 마이크 혼다 미 하원 의원님의 11월 선거승리를 기원합니다. 그 동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활동을 하고 계시는 의원님께서 승리하셔야 우리 문제를 전 세계에 더 많이 알려 줄 수 있고 더 나아가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7년 미국 하원에서 일본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해결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상정에 앞서 청문회를 개최하였을때 증언자로 참석했던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납니다. 여성이기에 남들에게 이야기 못한 가슴속 깊이 담고 있던 일본의 가해사실과 나의 피해사실을 생생하게 증언을 하게 되어 속 시원했습니다. 증언을 통해 일본의 전쟁 범죄사실과 이 문제 해결 필요성을 전세계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은 마이크 혼다 의원 덕분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결의안이 통과되었습니다. 통과 되는 날 또 한번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동안 외롭게 인권회복을 위하여 많은 증언과 활동을 하였지만 미국의회에서 통과되어 전세계인들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저에게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동안 혼다 의원께서 세번 나눔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방문할때 마다 저는 큰 힘을 얻었습니다. 내가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지 의원님을 또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언젠가는 일본이 공식 사과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새벽 4시에 기상하여 하느님께 기도하고 새벽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의원님께서 2014년에는 2011년 결의안을 준수하도록 미국 세출법안에 명시하여 법제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저도놀랐습니다. 저도 11월 선거에서 기도를 계속하겠습니다.
의원님은 정의를 실천하는 인권 활동가입니다. 의원님을 보면 정의는 받드시 살아 있다고 하느님께 이야기 합니다.
나눔의집 할머니들이 저와 같은 생각으로 마이크 혼다 의원님을 응원합니다.

나눔의집 김군자, 정복수, 박옥선, 김순옥, 이옥선, 배춘희, 강일출, 유희남, 김정분, 김왜한


편지를 읽고나서 한동안 멍한 기분이 들었다.
미국의 일본계 마이크 혼다의원이 3번이나 한국의 위안부 생존자 여사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을 방문했고 그녀들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한 법안제정을 위해 애를 써왔다. 하지만 한국인인 나는 간혹 슬프고 가슴아프다는 생각은 했지만 사실상 단 한번도 제대로 분개한 적이 없었고 그녀들을 위한 생각과 행동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 마음에 깊이 아렸다. 또한 김군자 여사는 속시원히 미 의회에서 자신의 고통을 증언을 할 수 있었음에 기쁨의 눈물이 난다고 한다. 그 분들께는 그 모든 일들이 지나간 과거가 아니고 아직까지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가슴을 쥐어뜯는 아픔이라는것을 정확히 깨달았다.
그분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고, 한국과 스카이프 비디오 컨퍼런스를 통해 그분들 만의 안타까운 사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첫번째 이야기: 이옥선 여사 (87세, 부산 광역시 출생)

그녀는 다정다감하고 여성스러우며 다소곳한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운 여인이다.
이옥선여사는 부산에서 출생했다, 12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단란하게 살았지만 너무나 가난해서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녀가 13살이 되었을 때 학교다닐 돈을 벌기위해 울산의 한 호텔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15세가 되었을때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한국 남자 한명과 일본인 한명이 강제로 그녀를 납치 했고 바로 중국으로 호송었다. 중국 북서부 길림시의 연길에서 7명의 중국여성들과 함께 감금되어 일본군 부대에서 성노예생활이 시작됐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채, 나이 어린 소녀가 머나먼 타지로 끌려가서 부모님과 가족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통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흰쌀밥에 고기반찬을 매끼 먹는것을 옆에서 보며 함께 생활하는 나이 어린 소녀들에게는 돼지에게나 줄 더러운 찌꺼기 만을 주었다. 그것도 너무나 적은양이어서 매일밤 배고픔에 잠 못이루는 적이 많았다. 또한, 시도 때도 없이 총으로 때리고 다리로차는 등 잦은 구타로 온몸에 멍과 상처가 아물날이 없었으며 주말에는 더욱 많은 일본군들에게 말도 못하게 시달렸었다. 그 기간동안 일본군에서는 그녀에게 각종 주사를 놓았고 3년간 지속된 독한 주사약으로 인해 그녀는 아기를 가질수 없는 몸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중국에 그대로 버려졌고 살아남기 위해 말도 안통하는 곳에서 골목길을 헤메며 구걸을 해 연명했다. 중국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나눔의 집에서 이 여사의 소식을 전해듣고 여러 가지 서류를 중국정부에 제출해 주어 2000년에 꿈에 그리던 고국 돌아올수 있었다. 그렇게 그리워했던 부모님은 저 세상으로 떠나신지 오래됐고 애타게 그렸던 고향에 돌아와 보니 사망신고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애통했었다. 사망신고를 취소하기 위해선 부산 가정법원에 복잡한 민사재판을 신청해야 했으며 완전히 국적을 회복하는데 1년이상이 소요되었다. 자신이 납치되어 생사의 갈림길에서 극심한 고통당하는 그 기간 동안, 고국과, 친척들로부터 완전히 버림받고 까마득히 잊혀졌다는 생각에 괴로와 밤잠을 자주 설쳤었는데 이제는 다 평안한 마음이다.
가장 맛있는 혹은 먹어보고 싶은 음식이 있으신지요하고 물으니 "흰밥에 김치하고 국만 있으면 젤 좋지" 라고 수줍게 웃으신다. 원하는 소원이 있으신지 혹은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는지요라고 물으니 "내가 가고싶은 곳은 하나도 없어, 그런데 소원이 하나 있어. 내가 죽기 전에 일본이 진심으로 무릎꿇고 사죄하면 좋겠어. 내가 전쟁에 따라 가고 싶어서 간게 아니고, 일본군이 납치해가서 그런거 다라고 세상에다가 속시원히 밝혀주면 내가 정말 한이 없겠어."라고 말한다.
연길에서 성노예생활을 할때 만난 강제 착출된 한국인 군인과 사랑에 빠졌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그를 찾기위해 수없이 걸었고 길림성 바오다오젠서 그를 만나 결혼하고 정착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남편은 중국에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전쟁터로 착출되어버렸다. 남편을 10년세월동안 기다렸지만 끝내 남편은 돌아오지 못했고 그녀는 다른 사람과 재혼했었다. 많은 사연을 뒤로하고 그녀는 2000년도에 고국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그녀는 어린시절 학교에 갈수 없었던것이 큰 한이라고 말하며 책을 많이 읽는다.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사죄를 요청하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인권운동가다.

두번째 이야기: 강일출 여사 (86세, 경북 상주출생)

그녀는 목소리가 또렷하고, 소신이 분명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유쾌한 분이다.

강일출 여사는 경상북도 상주에서 출생했다. 13살 때 여자친구 한명과 같이 학교로 가려고 했는데 경찰관이 와서 납치하면서 그녀는 군인으로 착출되었다고 했으며 중국으로 호송되었다. 감금되어 호송되는 중 만주를 들러 쉔양에 잠깐 멈췄다가 중국 장춘에서 일본군 부대의 성노예생활을 하게 되었고 다시 무단지앙에서 계속 성 노예생활을 했다. 5명의 여성들과 함께 있었는데 여자들끼리 말을 하려고 하면 못하게 가로막고 마구 폭행을 가해졌다. 생전 처음먹는 기름기 가득한 이상한 중국음식을 먹으면서 구토한적이 많았다. 이유도 없이 구타는 계속되었고, 머리는 매일 맞아서 상처가 나을 겨를이 없이 피가 항상 고여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녀의 머리에는 큰 상흔이 몇군데 남아있다. 부모님과 고향이 그리워 혼자 숨죽이고 눈물을 흘리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울지 말라며 온몸에 매질을 가했다. 전쟁이 끝나자 짐승같은 일본군들은 술렁이고 있었다. 그 때 그녀는 심각한 열병에 시달렸고 꼭 죽을 줄로만 알았다. 한 일본군이 그녀를 시체들 더미에 던져 놓았다. 다행히도 그녀는 죽기전에 한국 독립군에 의해 구조되었고 그녀는 중국 내에 있는 한국 자유군병원에서 여군으로 간호일을 하게되었다. 여군 전역후 중국 북서쪽의 길림성 길림시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중국인과 결혼하여 정착했다. 한국으로는 부끄럽고 엄두가 안나서 돌아갈 생각도 못하고,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중국정부로부터 집도 하나 받아서 그곳에서 거주해왔다. 2000년도에 나눔의 집과 연결이 되어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고 1년 반만에 국적을 회복해 평안히 지내고 있다.

가보고 싶으신곳이나 필요하신것이 있으신지요라고 물으니 "필요한것은 하나도 없어, 내가 뭐든지 필요한것은 다 있어. 근데, 죽기전에 가보고 싶은곳이 있어. 내가 간호사로 일했던 길림성 길림시의 병원에도 한번 가보고 싶고, 또 내가 살던 집에도 꼭 한번 가보고 싶어"라고 하신다.

간절히 바라는 소원을 물으니 가슴이 뭉클해지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부끄럽지만은, 딱 한가지 바라는 소원이 있어. 우리 대한민국이 아주 발전해서, 전세계 어느 나라도 침략을 못하게 강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어. 내 나라가 잘살아야지 나 같이 끌려가는 사람도 없을꺼고, 일본도 잘못했다고 빌지 않겠어? 일본이 나에게 사과하면 내가 정말 행복해서 덩실덩실 춤도 출 수 있을꺼야. 내 청춘을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진심어린 사과를 받으면 가슴이 후련할 것 같아."

세번째 이야기: 김군자 여사 (88 세, 강원도 평창출생)

그녀는 카리스마 넘치며, 정이 많고 감성이 풍부한 만년 소녀이다. 김군자 여사는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했고 여동생 두명이 있었다.
아버지는 강원도 깊은 산속에서 40살까지 혼자 살다가 15살이었던 어머니와 결혼했다. 김군자 여사가 9살 되던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4년 후 어머니마저 돌아가신후 고아가 되었다. 당시 13살이었던 그녀와 어린 동생들은 각각 친척집으로 헤어졌다. 17살이 되었을때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서로 결혼을 약속했는데, 남자 집안에서 고아와 결혼은 안된다고 극심히 반대를 했고 그 남자를 다른 여자와 결혼시켜 버렸다. 그 남자는 견딜수 없다며 자원하여 군대에 입대해 전쟁터로 나가버렸다. 어느 날 집에 있는데 경찰관이 들어 와서 기차정거장에 가서 뭐를 좀 주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기차역으로 가자마자 바로 납치당했고, 중국 만주 훈천에서 일본군의 성노예생활을 하게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먼거리를 걸어서 함경북도까지 도착할 수 있었고 거기서 기차를 타고 철원까지 갔다. 그런데 철원에서 남과 북이 갈려있어 남쪽으로 넘어갈 수 가 없었다. 한 1년정도 그 곳에서 살다가 기회를 보아 남한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가정부도 하고 절에서도 살다가 향후 천주교인이 되었다. 그녀는 다리가 약해졌고 지속적으로 통증이 많은 상태지만, 매일 매일걷기 운동을 하고 있다.

"내가 가정을 어찌 가질수 있겠어? 전쟁후 가까스로 고향의 친구네 집에 잠시 머물렀는데, 예전에 17살때 사랑하고 결혼을 약속했었던 남자가 소식을 듣고 만나러 왔었지. 반갑고 좋았지만, 이미 결혼한 남자라서 슬펐었지. 그런데, 남자가 나를 만나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부랴부랴 남자쪽 어머니와 부인이 바로 달려와서는 남자를 끌고 가버렸어.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남자는 자살을 해버렸어. 나를 오래도록 기다려주고 사랑해주었던 그런 좋은 사람이 자살을 해버렸는데, 내가 어떻게 행복하게 가정을 다시 이룰수 있었겠어. 그냥 이렇게 혼자 살 수 밖에"
"내 소원은 일본의 사과 와 우리의 아픔에 진정어린 배상을 해 달라는 거야, 왜 우리를 이렇게 짓밟고 내가 원하지 않던 삶을 살게해 놓고는 사과도 안하는건지. 정말 인간도 아니야" 그 당시 일본군을 다시 만나다면 이란 질문을 하자 "그야 당연히 죽이고 싶지"란 대답을 들었다. 김군자 여사의 회한과 고통이 그대로 전해짐을 느꼈다.

나눔의집 : 안신권 소장 인터뷰

Q. 나눔의집은 어떻게 세워진것인지?

A. 1992년 5월에 나눔의집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전국민 모금운동으로 약 1억원의 기금이 조성되어 서울 서교동 전세로 시작해서 12월에 경기도 광주에 나눔의집이 개관하게 되었다.

Q. 중국에 계시던 생존자들은 어떻게 올수 있었는지?

A. 한중수교가 1992년에 시작되었고, 그 때부터 중국과의 왕래가 시작되었는데 재중동포인 엄강빈 선생이 북경, 상해, 연길시등에서 한국인 위안부 할머니들 약 15명 정도를 발견하여 도와주고 계셨다.
그들이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하여 한분당 100만원씩 도와드렸고 한국으로 귀국하고 싶어하는 분께는 절차를 거쳐 한국으로 모셔오게 되었다.

Q. 위안부들의 숫자는 약 어느정도로 파악되고 있는지?

A. 총 20만명의 여성들이 일본군에 착출된것으로 추산된다. 1993년부터 자진 신고를 받았는데 총 237명이 등록했다.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고 현재 한인 위안부 54분이 생존해 계신다. 한국에 49분, 중국에 3, 일본에 1, 미국에 1분이다. 나눔의집에는 10분이 거주하신다.

Q. 나눔의집에서 할머님들과 생활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A. 할머니들이 우리가 아는 위안부의 극심한 고통뿐 아니라, 제 2의 고향이었던 중국에서 살다가 다시 한국으로 오면서 또 다른 이산가족의 고통 등도 작지 않을 것이다. 할머님들께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살고 싶으시냐고 물어보곤 했는데 한결같이 할머니들께서는 "착한 남편과 아이들 낳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다"고 하시는데 가슴이 뭉클했었다.
외부에 거주하시는 할머님들도 방문해서 잘계시는지 가끔 찾아뵙는데 나눔의 집에 계시던분이 따님이 모시고 갔다가, 치매로 요양원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요양원을 뵈러 갔는데 함께 계시던 환자분들과 직원분들이 할머님이 유명한 전직 변호사나 교수셨냐고 물었다. 왜냐면 치매이신 할머니가 다른 이야기는 안하고 오로지 "나는 미국에 비행기 타고 가서 미국 대학교에 가서 내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했어" 라는 말만 자랑스럽게 되풀이 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은 할머니께서 위안부 증인으로 미국의 대학교에서 증언을 했던 것이었다. 그 기억이 할머니의 인생에 가장 큰 기쁜 순간이었기에 계속 말씀하고 계신것이라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할머니의 한을 남들이 귀기울여 들어준 그 순간을 잊지 못하는것 같다.

Q. 미주 한인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A. 연세들이 높으셔서 점점 생존할머니들 숫자가 줄고 있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일본의 진심어린 사죄를 받을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다. 어린 소녀시절을 송두리채 뺏기고 오명을 덮어쓰고 사시는 것을 보면 분노가 생긴다. 할머니들이 한을 품고 생을 마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본이 변화하도록 우리의 슬픈역사를 잊지말고 다각도로 도와주시기를 바란다.

나눔의 집은 일본의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들의 쉼터이다.
기사에 사용된 사진 및 구체적 정보들은 생존자여사들과의 화상인터뷰와 한국 나눔의집(www.nanum.org)에서 제공받았으며, 안신권 소장과 나눔의집 가족들모두에게 감사드린다.
일본정부는 한치의 반성없이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 한국인 20만여 명과 네덜란드, 중국, 인도네시아의 여성등 총 40만명을 강제 동원했으나, 현 아베총리는 다시한번 우리의 누이들을 모욕하며 창녀라고 기만했다.
미국에서 지난 2007년 7월 6년간의 고군분투끝에 일본계 3세인 마이크 혼다 하원 의원이 일본의 치열한 반대 로비를 이겨내고 연방하원 위안부결의안(H.Res.121)을 상정시키고 통과 시켰다. 또한 2014년 2월 연방 포괄 예산안에서 혼다의원은 또 한번의 거센 일본의 로비를 무릅쓰고 미 행정부로 하여금 일본 정부에 결의안 이행촉구를 하도록 요청해야 하는 해당 문구를 포함하여 통과시켰다.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미국 국무부는 연방하원에 주기적으로 진행 사항을 보고하도록 법제화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이법안으로 비롯되어 세계 곳곳에서 유사한 법안들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한편 위안부 생존자들은 지난 20여년간 매주 수요일 서울 일본 대사관앞에서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계속해오고 있다. 약 900여회의 시위를 해왔다. 시위를 함께 시작했던 많은 생존자들이 원하던 결과를 보지못하고 눈을 감았다. 우리가 감추거나 잊고 넘어가서는 안될 우리누이들의 이야기이다.
우리 한국인들의 거대한 외침과 비상하는 날개가 꺽여버려서는 안된다. 그분들이 소원을 이루는 날까지 계속 되어야만 한다. 같은 혈육인 한인으로서 비장한 분노를 함께 느끼고 기필코 사과를 받아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