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들이 사랑하는 실리콘밸리 정치 실세 마이크 혼다 7선 하원의원

마이크 혼다 의원에 대한 많은 기사들이 있어왔다. 타임지를 비롯하여 미국 TV, 신문 등 다양한 주류 언론에서 그에 대한 다양한 기사들이 게재 되어있다.

그는 실리콘벨리지역 (District . 17)을 대표하는 7선 하원의원이다. 약 70만명이상의 실리콘 밸리 핵심 지역 주민들을 대표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의 총 국회의원수는 약 300명이며, 한국 국민이 4000만이므로, 한국의 국회의원 한명이 약 13만명의 주민을 대표하는 상황에 비추어 한국의 국회의원에 비해 약 5~6배에 달하는 주민을 대표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마이크 혼다, 그는 일본인 3세이다. 그런 그가 보수성향이 짙은 한인 교포사회에서 큰 지지를 받으며, 한인사회에서 가장 많은 기부를 받고 있는 정치인이란것이 독특한 현실이다.

일본인인 그가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계기는 여러가지가 있다. 한인교포들의 다양한 애로사항들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관여하여 여러가지 혜택을 받게 해주면서, 관심을 받게 되었다. 한국의 소주를 하드리커가 아닌 비어앤 와인으로 분류되어, 쉽게 식당에서 접할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한국의 떡을 냉장보관이 아닌, 상온에 보관하여 한국 떡의 풍미를 잃지 않게 하였다. 또한 이민법 문제에 있어서도, 이민자들과, 서류미비자들에 대해 포괄적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주장을 펴오고 있다.

그러나, 가장 주목받는 점은, 일본과 한국의 예민한 정치사안인, 한국의 위안부에 관해 먼저 문제를 제기하여, 정치적으로 이 문제점을 제기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인권문제에 누구보다 민감하다. 미국 국민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인권탄압 문제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일본인 3세 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 받아야할 기본적 가치에 촛점을 기울이고 있는 정치인이다.

그가 들려준 그의 어린시절은 보통 미국의 주민이 겪지 못한 여러가지 경험들이 포함된다. 그가 막 태어났을때, 제 2차 세계대전 직후였었고, 그의 가족은 미국에서 마련한 콜로라도주의 단체 캠프로 이주하게 되었다. 미국은 전쟁 직후, 전미에 사는 모든 일본계 사람과 그의 가족들을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모든 일본계 주민을 캠프로 집결 시켰다. 집결된 일본계 국민중 약 2/3정도가 이미 미국 시민이었고, 나머지 1/3은 일본계였지만 당시 법은 일본인의 미국 귀화를 금지했기에 미국 시민이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는 어렸기에, 자세히 그 곳의 일들을 기억 할 순 없지만 당시 많은 일본계들이 자신의 집과 사업과 학교 등 모든 것으로 부터 떠나야 했고, 집단 캠프생활을 오래도록 해야 했던것은 정말 불합리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약 5세 무렵까지 부모님과 가족들과 그 캠프에서 집단 생활을 하게되었다. 그 후에 미 정부의 주선으로 단체적으로 딸기 농장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머님은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인 2세로, 가정에 헌신하며 조용한 분이셨다. 아버님은 성격이 곧고 강하신 분이셨다.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며 성실한 생을 사셨지만, 여러 가지 미국정부의 일본인에 대한 불합리한 대우에 대해 마이크에게 설명해주며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셨었다.

그도 그의 아버지의 생각에 동의하며, 적어도 미국 내에서 미국 국민들중에서 억압을 받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과거에 일본계 미국인이 캠프로 이사를 가야만 했던 것은 미국 정치인들중 어느 누구도 “부당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내에서 어느 계층도 피해를 받지 않도록 인권문제에 관심을 계속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그가 일본계이기에 앞서, 한인 위안부문제에서 피해자 편에 서는것도 그러한 연유에 기인한다.

그는 산호세 스테이트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중학교에서 교감을 했고, 몇몇 초등학교에서 교장을 역임했다. 학교는 모든 학생들에게 발전의 기회를 주는 기초기관이 되어야하며, 한 학생 한 학생들에게 관심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이크 혼다의원은 외향적이지 않고 조용하며, 사람이 많은 곳에서 스포츠를 관람하기 보다는 혼자 사색하며 낚시를 하거나, 책을 읽고 음악을 듣거나, 의미있는 영화를 관람하거나 경치좋은 곳 산책하는 것을 즐긴다. 가끔 한국 영화를 관람하는데, 좋은 영화가 많다고 말한다. 집에서는 대나무를 키우는데, 아시안의 특징이 잘 나타나서 좋아한다고 한다. 대나무는 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함께 자라며, 큰 바람이 불때는 다같이 휘어져서 이겨내고, 그러나 아무리 어려움이 닥쳐와도 부러지지 않고 때가 되면 다시 일어서는 저력있는 나무여서 좋다고 한다. 아시안들의 특성과 잘 맞는 나무라고 말하였다.

그에게 자신을 만약에 동물에 비유한다면 어떤 동물로 비유하겠느냐고 묻자, 생각해 본적이 없다고 웃고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거북이" 라고 한다. 자신은 활발하거나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고, 위험에 처해 있을때는 거북이처럼 몸을 단단한 껍질 속으로 보호하고 생각을 하며 참고 기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위험부담이 있어도 목을 내밀어서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인내를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거북이처럼 외모가 매력있지는 않지만, 뭔가 믿음을 줄 수 있는 동물인것 같다고 호탕하게 웃는다.

그가 인생에서 가장 기뻤을 때는, 아들과 딸이 태어났을 때 였다.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과,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다. 가장 슬펐을 때는 아버지께서 간단한 수술을 받게 되셨는데, 급작스럽게 수술경과가 악화되어 하루 만에 생을 달리하셨던 때다. 가족들은 작별을 할 시간 조차 없었기에 충격과 슬픔을 가누기 힘들었다고 한다.

또한, 일에 몰두하는 그의 곁에서 평생을 조용히 내조하며, 아이들에게 무슨 일에나 원칙을 지킬 것을 강조하고 평화롭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도록 해준 사랑하는 아내가, 2004년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다 세상을 떠났을때 정말 가슴이 미어졌다. 항상 바쁘기에 잘 대해 주지도 못한 아내가 떠나자 깊은 마음의 상처가 남았다고 한다. 소중한 사람들과 작별하게 될때가 가장 견디기 힘들다고 말한다.

아시안으로서 정치계에 뛰어넘을 수 없는 장막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지 묻자, 그는 뛰어넘지 못할 장막은 어느 분야에나 없다, 하지만, 단지 좀 어려운 담장이 있을 수는 있다고 말했다. 그가 처음으로 하원의원에 당선될 당시, 주민 중 아시안 비율이 약 3%에 불과했다. 현재 지역구에는 아시안 비율이 약 50%정도 된다. 미국 하원의원중 대략 아시안은 약 10여 명이 있는것으로 알려졌다. 아시안 비율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정치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가 생각하는 정치란, 정부의 정치 만이 아니다. 가정의 구성원사이에서도, 직장의 모든 부서에도 정치가 존재하며, 어떠한 조직이 이상적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지속적으로 서로 노력을 해야하며 이것 하나 하나가 ‘정치’임을 강조했다. 또한, 정치란 생명체와 비슷해서, 큰 성과라고 생각하는 어떠한 결과도 시대가 변해 감에 따라,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아시안 가정에서 장손의 존재가 다른 아이들의 존재와 다른 것도 가족 구성원들의 노력에 의해 바뀔수 있으며, 점차 바뀌고 있는것 또한 이런 사소한 것들이 바로 가정 내의 정치중의 하나라고 예를 들었다.

그는 이 세상의 많은 것으로 부터 매일 새롭게, 끊임없이 배우고 있다고 한다. 대나무로 부터 배우고, 손자손녀로 부터도 배우고, 만나는 많은 주민들로 부터도 배우고, 거북이로부터도 배운다. 7선 하원의원으로 8선을 눈 앞에 두고있는, 실리콘 밸리 정계에 주목받는 중견 정치인으로 소탈하고 유머를 잃지 않는, 겸손한 성품의 그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의 정치적 성과와 사상은 기존의 많은 매체에서 다루어왔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그의 인간적인 면과, 가정, 어린시절, 취미 등 그에 대한 인간적인 면에 촛점을 두어 진행했다.

우리 한인교포들이 6월 3일 있을 하원의원 프라이머리 선거에서, 한인사회에 많이 귀를 기울여왔던, 마이크 혼다의원에 투표할 것을 독려하고 싶다. 선거에 관심을 가지는 한인들의 동참이 늘수록, 우리 가 속한 사회가 더욱 우리에게 귀기울여 줄것이며, 정치란 모든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특권이며 동시에 우리의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 할, 피하면 안 될 필수 의무인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