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애란 박사, 미 국무부 주최 '국제 용기있는 여성 상' 수상

제1호 탈북 여성 박사 / 북한 전통음식 문화 연구원장, 요리 연구가
이 애란 박사 - 미 국무부 주최 '국제 용기있는 여성 상' 수상

이 애란 박사를 본지 사옥에서 만나 그녀의 여러 경험들과, 그녀의 소망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 박사는 현재 서울에서 '북한 전통음식 문화 연구원'을 운영하고 있는 요리 연구가다. 탈북여성으로서는 제 1 호 박사학위 소지자로, 이화여대에서 석/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이 박사는 현재 약 20일간의 일정으로 미국의 주요 대도시를 순회 방문 하고 있다. 그녀는 북한 동포들의 인권향상 및 한국의 자유 통일에 대한 소망과 큰 염원을 품고 많은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박사는 미국 국무부에서 '국제 용기 있는 여성 상(Award for International Women of Courage)'을 수상했고 당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영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의 직접적인 환대를 받은 바 있다. 이 박사는 1997년 4개월 된 아들을 업고 목숨을 건 탈북에 성공했고, 파노라마 같은 인생 역정을 거치면서도 다양한 사회봉사 및 계몽 활동도 꾸준히 해 오고 있다. 아담하고 여린 체형에 화사한 미소를 지닌 이 박사로 부터 강인한 열정과 희망, 그리고 뜨거운 도전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만난사람: 발행인 아이린 서

이 애란 박사의 탈북 및 대한민국 정착 초창기

이 애란 박사는 1964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조모가 6.25 전쟁 당시 월남한 사실이 밝혀져 출신 성분이 좋지 않다 하여 한지인 양강도로 추방당해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냈다. 어린 나이에도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면 집안 성분을 개선할수 있을것이라 믿고 수학에 두각을 드러내며 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출신 성분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에 좌절했고 어린 마음에 죽고싶은 마음도 들었었다. 간신히 신의주 경공업대학 발효공학과 졸업 후 북한 식약청 품질 감사원으로 약 13년간 근무했다. 그러던 중에 미국에 사는 사촌 이혜리가 쓴 '할머니가 있는 풍경'이란 소설을 읽게 되었고,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 책은 할아버지가 '김일성 물러가라'는 피켓을 들고 싸웠다는 내용의 가족사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었다. 드디어 1997년 8 월 16일, 아버지와 남동생과 함께 4개월된 아들을 업고 함께 목숨을 건 탈북에 성공했다.
당시 중국과 베트남을 경유해 한국 입국에 성공했으나, 당시 극심한 IMF 한파를 겪던 시절이었기에 간신히 호텔 청소와, 신문, 우유 배달 등을 닥치는 대로 일하며 아들과 살기위해 발버둥 쳤으나, 처절한 생계위협을 느끼던 중1999년 한 생명보험사 취직했다. 초기 보험 설계사로서 처음 경험 해 보는 영업부담에 괴롭기도 했으나, 죽기 살기로 불굴의 노력을 기울여1년 여만에 실적이 크게 뛰어 한달에 2 천 7백만원을 버는등 성공가도로 접어 들었다. 그녀의 뛰어난 '남한 사회 적응기'는 연합뉴스에 기사로 보도되어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요리 연구가로 거듭나다

이 박사가 불철 주야 노력한 결과 어느정도 재정적인 여유가 생기게 되자,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던 북한시절 전문분야였던 식품 관련 업무를 시작했다. 즉, 본격적으로 북한 음식 관련 사업을 시작했는데, 2000년 연말 사당동에 토끼 고기 전문점 '씀바귀네'를 개업하게 되었고, 2009년 이화여자대학교 식품 영양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해 탈북자 여성으론 최초로 박사가 되었다. 그 후 경인 여자대학교 겸임교수, 신흥대학교 강사로 재직했다. 또한 2008년 '북한 전통음식 문화연구원'을 설립, 한국에 북한 음식 문화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서울 종로구에서 '능라밥상'이라는 북한 음식 전문점을 경영하는 등 요리 연구가로서 평소 바라던 분야에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지속적인 인권 운동 활동

이 박사는2012년 2월 23일 중국의 탈북자 강제 송환에 반대하며 거리 시위를 직접 시작했으며 단식 농성을 벌이는 등 북한 인권 운동에 앞장 섰고, 2013년 8월 서울 종로구 주한 중국대사관 건너편 옥인교회에서 열린 제5차 탈북난민 북송 반대 전 세계 캠페인에도 주요 연사로 참여해 중국 정부에 진실어린 호소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실향 안보당의 비례대표로 출마하기도 하는 등 다각도로 적극적인 사회 활동 이어오고 있다. 이 박사는 끊임없이 북한 인권개선과 탈북자 정착지원에 힘쓰고 진정한 남북 자유평화를 위한 운동을 벌이며 각계에 동참을 호소 해 오고 있다. 특히, 그녀는 남한에서 탈북 여성 및 초/중학생들 청소년들을 경제적으로 돕는 등 탈북자들의 정착을 돕도록 지속적인 지원을 하고 있으며 이 공로를 기려, 2010년 3월 11일에 미국 국무부에서 수여하는 '국제 용기 있는 여성상'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또한 2010년 북한 공로매달 새기술 혁신상, 2013년 통일부 장관상, 2010년 국제 소롭티미스트 앞서가는 여성상(루비상), 2013년 YWCA 젊은 여성 지도자상등을 수상했다.

북한의 문제와 해결 방안

이 애란박사는 말한다. 평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김정은은 계속해 핵무기를 만들고 핵으로 세계를 위협하고 있고 미사일을 발사하고 공개처형을 자행하고 정치범수용소의 주민을 지독하게 탄압하고 있기에 북한과의 평화만을 지키기 위해 이러한 상황을 용인해서는 안되며, 김정은이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막아야 만 한다. 그런 상황이하 할 지라도 북한 가족들의 많은 수가 극심한 굶주림의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다. 이들에게는 쌀과 밥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질 못해 북한 사회에 폭력이 더욱 난무하는 상황이다. 한국에 있는 탈북민 3만 명과 실향민 1000만 명 중에 북한 가족에게 쌀을 갖다 주는 데 반대할 사람 있겠나? 쌀 한 가마니 싣고 가서 가족들 밥이라도 만들어 주자는데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 있겠나? 북한의 굶주린 주민을 살리는 게 평화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이런 행동을 통해 북한 주민이 자유를 얻고 인권을 회복해 통일을 이루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아들과 함께 본 영화 '신이 보낸 사람(Apostle)', 2014 실화를 바탕으로 한 눈물과 감동의 이야기

이 박사는 1997년 생후 4개월 된 아들을 업고 탈북하는 과정에서 북한 국경경비대에 두 번이나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이로 인해 북한에 남은 외삼촌을 비롯한 가족들은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에 가슴이 미어졌다. 대한민국에서 아들을 키우면서 그 아이가 태어나고 떠나온 북한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었는데 '신이 보낸 사람' 이라는 영화를 아들과 함께 보면서 서로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들은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생후 4개월에 떠나 아빠와 북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아들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엄마 고마워, 대한민국 사람들은 진짜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돼" 아들로부터 진심어린 "고맙다"라는 말을 들으며 가슴이 울컥했었다.
이박사와 아들은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서 영화를 본지 일주일이 되도록 눈물이 나고 먹먹했다고 한다. 처참하고 잔인한 북한의 실상을 영화가 너무 잘 설명하고 있었고, 자유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제대로 된 지도자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고 전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압제로부터 해방되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보다 더 소중한 일은 으며, 북한주민들에게 자유와 인권을 선사하는 것이야 말로 남한에 사는 우리들이 최선을 다해야 할 과제라 믿는다.
그녀는 탈북민으로서 탈북민들의 마지막 희망은 북한주민들의 생명을 지켜주고 그들에게 자유를 선물하는 일이라 믿고 있으며, 자유 대한민국의 국민인 것을 항상 자랑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하며 하루빨리 자유 통일 대한민국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전한다.

그녀의 신앙 배경과 기도 내용

이 박사의 아버지는 평양 창동교회에 다니셨고, 할아버지는 집사로, 할머니는 권사로 섬기셨다. 할아버지가 김익두 목사님께 전도 받아 가까운 가족은 모두 기독교인으로 살고있다. 그녀는 보험회사를 다니며 승승장구 하기 시작했을때 하나님께 '하나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정도로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했다. 북한에서는 열심히 일해도 먹고 살 수 없는데 남한에서는 열심히 일하여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참 감사하고 고마운 나라라고 생각했다.

한때는 사기를 당해 모든 것을 잃고 업드려 금식기도를 할때 주위 여러분의 도움으로 결국 잃은 것을 다 돌려 받았으나 그일로 깊은 상처를 받기도 했었고, 때때로 너무 어려워 '하나님, 망하게 하시려면 차라리 빨리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 한 적도 있다고 털어놓는다.

지금은 한국에서 김정은 암살을 목표로 현상금을 모금하고 있고, 또 오토 웜비어를 추모하며 한미 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기도의 마음으로 미국을 방문했으며,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북한 주민이 자유경제 체제하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하고있다고 전한다.

이 애란 박사의 유일한 마지막 소망

이 박사의 이번 미국 방문은 북한 방문시 1년 5개월간 억류되었다 혼수 상태로 미국에 돌아와 사망한 대학생, 오토 웜비어씨를 추모하고 북한의 인권 문제를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이다.
특히, 오토 웜비어가 친구들과 이 박사의 북한 전문 음식점 '능라 밥상' 식당에 방문해 저녁식사를 한끼 했었는데, 북한에 갈 계획이라는 아주 건강하고 활달한 오토 웜비어를 직접 만났었고, 그가 북한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그때 무서운 곳에 왜 가려느냐고 만류했던 기억이 나서 너무 안타깝고, 밝고 순수하던 그의 모습이 생생해 너무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그녀에 따르면 북한에서 수감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서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북한 보위부가 듣고 보지도 못한 죄명 과 최악의 형량을 판결하고, 벙어리도 말을 시킨다고 할 정도로 고문이 심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의 가족들에게 북한에서 태어난 한 사람으로서 정말 미안한 마음이라 전한다. 이 박사는 웜비어의 장례식때 그의 모교인 버지니아 대학 친구들이 푸른색 리본을 단것을 보고 푸른색 리본을 한국에서 손수 만들어 가지고 미국에 왔다. 오토 웜비어의 묘소에 방문했는데 비석이 없어 준비해 간 푸른 리본을 놓고 오토 웜비어를 추모했으며,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 국제 사회에 도움을 호소하기 위해 이번 미국 방문을 기획했다고 한다. 이 박사는 언젠가는 꼭, 그러나 가능하다면 하루 빨리 평화를 누리며 자유롭게 북한 주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것이 이 박사의 유일한 마지막 소망이라 말한다.

이 애란 박사와 대화를 나누며, 혈육을 나눈 한 민족, 공통의 언어와 문화로 이루어진 북한과 대한민국이 서로 맞대어 살면서도 대화도 못하고, 왕래도 없이 오랜 세월을 헤어져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찢어지게 아픈 일인지 절절이 깨닫게 되었고, 오늘도 처참히 살아가는 북한 정권하의 우리 형제 자매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 한민족은 무슨 일이 있든 절대 북의 동포를 포기 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소원인 자유 통일을 위해 기도와 염원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각계 각층이 다각도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 소원을 이루어 나아갈 것을 믿는다.

*** 북한 전통 음식 문화 연구원 (www.nkfood.or.kr), 자유 통일 문화원(www.cl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