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규희 - 미 국방 외국어대 한국어과 교수

'한국 부채춤'으로 미 전역 한인 문화 전파의 주역 황 규희 - 미 국방 외국어대 한국어과 교수

매년 샌프란 시스코 유니언 스퀘어에서 열리는 한국의 날 행사에 매년 젊고 씩씩한 미 여군들이 핑크색 한복과 핑크색 족두리 그리고 흰깃털이 달린 화려한 핑크색 부채를 들고 신선하고 박진감 넘치게 한국 전통 부채춤을 선보인다. 한인이 아닌 다양한 민족 여성들이 부채로 시원한 파도물결과 피어나는 꽃송이를 매끄럽고 우아하게 보여줄 때 마다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과히 한국의 날 행사의 한송이 꽃이라 할 수 있는 모습이다. 그들은 미국방 대학원에 재학중인 미 여군들이다. 미 전국에서 몬트레이의 국방 대학원으로 공부하러 온 재원들이다. 그들에게 한국의 전통 무용인 부채춤으로 한국 문화를 접하게 해주고, 또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황규희 교수는 15여년간 매주 그들과 만나 그들에게 한복을 입는 법부터 부채를 잡는 법, 그리고 음악에 맞추어 부채를 자유자재로 펼치는 법, 그리고 한국 전통 춤사위를 가르쳐 오고 있다. 미군들이 한국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고, 공연을 하면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주어 미 전역, 또 세계로 퍼져나가 미군으로서 평생 군 복무를 하게 될 그들이 한인들의 친구로 거듭나고 있다. 개인적 시간을 할애해 애국심 하나로 국위 선양과 민간외교의 선두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황 규희 교수, 소탈하고 진실한 그녀는 소녀같은 순수함과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모국의 사랑을 지켜가고 있다. 만난사람 발행인 아이린 서.

Q. 간단한 본인 소개?
A. 제 이름은 황규희, 규희에서 가장 비슷한 발음에서 따온 <케이트>라는 영어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몬트레이에 1984년에 왔고 1985년부터 미 국방외국어대학 한국어학교에서 근무하고있습니다. 국방 외국어 대학을 다니면서 교육분야이기에 저의 기존 예능에 있었던 전공분야를 교육학으로 바꾸어 처음부터 다시 전공 공부를 시작했고, 직장과 강의를 동시에 한다는 것이 어려웠지만, 온라인과 강의 수업을 병행하여 Ashford University 에서 2002년 교육학 전공을 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 국방외국어 대학은 공무원체제와 교수체제로 나뉘어져있고, 저는 초기 국방외국어 공무원으로 입사하였기때문에 현재까지도 미 국방외국어 공무원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 언어교관으로 임명되어있습니다. 한국학교 초기 1985년도에 입사하여 현 2016년까지 31년간 미국 공무원으로 평교사로 부터 시작하여 전체팀을 이끄는 팀장의 업무까지 골고루 담당하였으며 지금도 역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공무원의 위치를 병행하는 자리이다 보니, 한국어를 가르치고,학생들의 진로를 담당하며 같은 동료교수들의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는데 까지 모든 분야에 걸쳐 전방위적인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Q. 어린 시절의 꿈, 기억나는 추억?
A. 제 고향은 강원도 원주입니다. 부족할것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님 덕분에 부유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지방에서는 이름 석자만 대면 다 아는 집안의 소위 지방 유지였기에 한번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어린시절에는 그것을 모두 당연한것처럼 받아들이고, 마땅한 권리인것처럼 생각이들어 감사함이 없었는데 지금와 제가 그 어른의 시기가 되고 보니 부모님이 저에게 베풀어주신 넉넉함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었는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전통적인 가정이었고, 아버지가 엄하셔서 고등학교때까지 등산한번도 못 가봤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억울해서 고3때 도서관에 간다고 하고 과감하게 몰래 등산을 간적이 있습니다.나중에 친구들과 정말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추억을 만들고싶어서 몰래 갔다가 못 올뻔 한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 때 생각하면아찔하지요. 처음으로 거짓말하고 등산을 갔는데,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상상도 못 할일이였지요. 다행히도 우여곡절끝에 집에 돌아왔어요. 그게 가장 큰 에피소드입니다. 너무나 아무것도 아니여서 쓸만한 것도 아니지만, 에피소드라면 또하나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친구 연애편지 대신 써주고 그 친구는 내가 편지를 대신 써줄 때마다 내 군것질을 사줘야했어요. 참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린시절 평범해서 평범하지 않은 사람을 존경한적은 있습니다. "전혜련" 소녀시절 문학에 빠진 학생이라면 한번쯤 전혜련에게 빠지지 않은 학생들이 없을 정도로 전혜련씨의 글은 나를 매료 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감상적이였고 지극히 비현실적이였던 소녀에게는 큰 인물이였지요.나름 글을 좀 썼기에 글만 쓰기만 하면 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우등상은 못 받아도 아무글이나 쓰면 꼭 상을 받았어요. 어떨때는 내가 쓴글은 안되고 내가 대신 써준 친구글이 상을 받을 때도 있었지요. 어쩜 정독을 하기 보다는 잡히는 대로 책을 읽기 좋아했어요. 다독을 한 덕을 본셈이지요. 하지만 반드시 해마다 개근상을 받았습니다. 저희아버지는 우등상보다 개근상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글 쓸 때마다 상을 받고 해마다 개근상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경우 정근상이라도 받았습니다.

Q. 현재 직업을 갖게된 계기나 멘토는?
A. 지금의 직업을 가진 계기는 아주 우연히 제일장로교회 목사님의 추천으로 되었습니다. 몬트레이에 국방외국어 대학에 한국어 학교에서 한국어로 미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 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하셨습니다. 저의 기질과 성품에 아주 잘 맞을 것이고 한국인의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는 곳이라면서 추천해 주셨습니다. 어렸을때부터 교육이나 가르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저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항상 돈 보다는 명예와 가치를 먼저 생각하라는 아버지의 가정 교육도 어쩌면 크게 작용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외국에 있으면 애국자가 된다고, 어쩌면 미국땅에 서 다른 어떤것보다 조국에 대한 글을 알리고 문화를 알리는 것이 저에게는 다른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이 인생에 있어 가장 의미있고 명예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저함 없이 미국방대학에 지원하였고, 그것이 하늘의 뜻과 맞았는지 바로 그 해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

Q. 현재 직업의 힘든 점과 좋은 점은?
A. 직장을 다니면서 처음에는 다양한 문화가 재미 있을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문화충격으로 다가 왔습니다. 공무원 사회가 그렇듯 엄격하고 까다로운 점은 있었지만, 그런것은 오히려 한국에서 부터 각오를 하고 온 터라 어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보다는 같은 한국 동료들을 대하는 것이 저에게 가장 힘든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오히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미국 사람들과는 더욱 소통이 잘 되었습니다. 또 그네들의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같은 한국 동료를 대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자라온 가정 배경과 또 철학, 그것이 오히려 동질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힘들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은 그때 그 시절 직장내에서 가장 어렸기도 했지만, 다른 연세든 교수진들과 함께 일한다는것은저에게는 마치 수십명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집안 살림을 하는것처럼 모든 일거수 일투족이 조심스러웠고, 엄격하기만 했습니다. 조금의 말실수 조금의 흐트러짐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직장생활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잘 타협하지 않는 성격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한 직장에서 오래 근무한 결과 적당히 지내는 법도 터득을 했습니다. 여전히 녹녹하지 않은 직장생활이지만 이젠 여유스러움도 생겼습니다. 예전처럼 힘들지는 않습니다. 아마 한국학교의 특유의 예절과 예법이 그 당시에는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었던 것 같습니다.철저한 존대말과 호칭과 예절을 더욱 본이 되어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초기 교수진들에게는 더욱 엄격하게 적용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직장내의 분위기가 미국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너무나 맞지 않아 받아들이는것이너무 힘들었지만,뒤돌아 보면 그런 경험을 나 자신을 내적, 외적으로 더욱 강하고 더 질서있게 만든 토대가 되었기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Q. 인생에 중요한점?
A. 인생에 중요한 점은 건강한 몸과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마음과 몸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기본에 충실하고 건강할때 다른 꿈을 꿀수 있고, 미래를 열수 있습니다. 기본이 충실하지 않으면 겉이 화려하고 거창해 보여도 신기루처럼 금방 꺼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15년동안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학생들을 동원에 부채춤의 한국문화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도 기본과 작은것에 애정을 갖았고 그 애정과 열정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없이 화려하고 거창한 것을 먼저 생각했더라면 저는 아마 시작 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초라하기 그지없었던 무대, 아무도 관심갖지 않았던 문화가 현실이였던 그 당시에도 제가 굳세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건강하고 단순한 충실함이 있었기 때문이였습니다. 그 의지와 성실함이 아무리 작은것이라 하더라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Q. 가장 행복한던 순간은?
A. 어린 시절이였어요. 무난하게 자란 어린시절이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이혼하고 아들 둘 혼자 키웠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게다가 직장생활이 얼마나 버겨웠는지... 아이들 혼자 키우면서 직장생활하는 게 제일 힘들었던 순간들이었고, 아이들 커서 나가니까 저절로 힘들었던 순간도 없어지고, 이젠 시니어가 되어서 산전수전 화생방전 수중전 육박전까지 치루다보니 저절로 극복이 된것이지요.

Q. 여가시간의 취미는?
A. 몇년전까지 스키를 탔어요. 저희 학교에서 추수감사절지나 스키 시즌이 오면 그때부터 6개월간 스키시즌 입니다. 매주 스키 트립이 있는데 거의 한달에 2번은 갔습니다. 스키에 미치다시피 했는데, 점점 스키 값이 올라가기 시작하고 좀 스키 를 타다보니 싫증도 나고, 스키 탈때 스피트 내는 기분은 스키 타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매력입니다. 나중에 활강도 하게 되었지만 스키 탈 때 제일 기분이 좋을 때는 리프트에서 내려서 설경을 바라 보는 것이 었어요. 모두들 스키타기 바쁜데 나는 리프트에서 내리자 마자 설경 먼저 봅니다. 그 때 스트레스도 없어질 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한 감사함과 동시에 희열과 환희를 느끼고 건강함에 눈물 겹도록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Q. 앞으로의 꿈은 ?
A. 앞으로 꿈은 그리 대단한 꿈이 아닙니다. 어린 나이라면 얼마나 꿈이 많겠습니까? 이만큼의 나이를 살다보니 꿈이 소박해 졌습니다. 건강하고 건강해야한다는 것, 모든 꿈이라는 것도 사실은 건강해야 가능한 것이기에 평소에도 건강에 관심은 조금 있었지만 요즘은 늘 건강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건강한 생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 아닐까 합니다. 샌프란시스코 저널에 실렸던 분들의 글들을 읽어보니 대단한 포부들도 있고 소박한 꿈을 가진 분들도 있는데 그역시 모든 것이 건강이 허락될 때가능한 일이기에 아마 꿈이 그렇게 바뀌었을겁니다. 또 다른 꿈 하나는 내 능력이 닿는 한 부채춤팀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Q. 같은 직업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조언이 있다면?
A. 저는 미국에 사는 젊은 한국인들에게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미국에서 당당한 한국계 미국인으로 생활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당당한 한국계 미국인이 되려면 부단한 노력을 지속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속담에 "No pain, No gain" 아주 짦은 속담이지만 제가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쓰는 미국 속담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존경인물중 한분이 인요한박사님인데요, 인요한 박사의 집안은 4대째 대를 이어 교육 의료 봉사 활동을 하며 우리나라 사회 발전에 공헌해왔고, 우리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인요한 박사는 개정 된 국적법 제7조 제1항 제2호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자)에 의해 특별 귀화 허가를 받고 2012년 3월 21일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에게 대한민국 내 외국 국적 불행사 서약을 함으로써 기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지 않고도 대한민국 국적과 함께 복수 국적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태극기만 봐도 뭉클하고 울음이 나는 분, 그 뿐만 아니라 이분은 한국을 대단한 나라라고 하시며,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강조하십니다. 저역시 100프로 이분과 같은 생각입니다. 가슴을 가다듬고 숭고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태극기를 바라보며 애국가를 심장으로 부터 부를 때면 눈물이 솟는 적이 간혹 있습니다. 감히 저 스스로를 민족주의자라고 칭하고 싶습니다. 부족하지만 그렇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채춤도 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제 빛을 잃지 않고 좋은 방향으로 퍼져나가도록 노력하는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 사는 젊은 한인계 후세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미국사회에 당당히 도전하라는 것, 대단한 한국인 기질을 보여야 한다는 것, 한국인들은 어디를 가든 대단한 능력을 발휘 한다는 것, 여기에 다 나열할 수 없을 만큼, 한국인으로서 당당한 자부심을 가지라는 것, 앞으로 미국사회 어디서나 훌륭한 자리에서 모범적인 일을 하는 한국인들이 흔하게 볼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부족한 제 이야기에 관심가져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합니다.
2017년 밝아오는 새해에 모든 한인들 가정에 귀한 열매 가득맺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