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세균, 6선 국회의원, 대한민국 국가 서열 2인자
대한민국 제 20 대 국회 의장
산업 자원부 장관 역임, 민주당 대표 역임
샌프란시스코 유니온 스퀘어에서 정세균 국회의장을 만났다. 그는 시차와 긴박하고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피로한 기색하나 없이 밝고 생동감 있는 모습으로 그를 맞는 많은 한인들에게 유쾌하게 인사를 건냈다.대한 민국 정치계의 꽃이라 불리는 국회 의장으로서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있는 정계에서 어떤 행보를 이어 나갈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정세균 의장, 그의 지난 인생사와 가족, 그리고 앞으로의 비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지역의 화창한 날씨와 더불어 한인 교민들의 따뜻한 환대에 감사하며 큰 호감을 받았다고 밝히며, 미국 교민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자상한 배려에 항상 감사한 마음이라 전했다.만난사람 발행인 아이린 서
정세균 국회의장, 학창 시절
그는 1950년 11월 5일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개안들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농부인 부모님 슬하에 4남 3녀중 셋째로 아들로는 둘째로 태어나 자랐다. 어린시절, 소꼴을 베러 다니고, 몸에 부치는 나뭇짐을 메고 뻘뻘 땀 흘리며 고생을 했다. 처음에 가정 환경으로 인해 전주 공업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대학에 진학하고자 결심후 전주 신흥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이때 일화로 어느날, 전주 신흥 고등학교 교장에게 무턱대고 찾아가 "전주 공고에서 1등을 한번도 놓친 적이 없는 정세균입니다. 신흥 고등학교를 다니고 싶은데 장학금을 안 주시면 다닐 형편이 못됩니다. 장학금을 주시고 전학을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했고 신흥고등학교로 전학해 졸업할 수 있게되었다. 재학시절 매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하며 돈을 모아 학비와 생활비에 보탰다. 신흥고는 개교 100년 만에 정의장으로 인해 처음으로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배출하게 되었다.
고교 졸업후 고려 대학교 법과 대학을 마쳤다. 대학 재학시절 고대 신문 기자, 총학생회장으로 활발히 활동했고 유신 체제 반대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의 지인들은 그를 '진촌'이라 부르기도 한다. 즉, '진짜 촌놈' 과 '진안 촌놈'의 줄임말로 애정이 담긴 별칭으로 그를 살갑게 부른다.
사회 경험 및 정치인으로의 행보
대학 졸업후 1978년 쌍용그룹에 입사해 시멘트 영업부터 시작해 기계부품, 신발 등 소위 '라면에서 미사일까지'라는 국제 영업의 최일선에서 일했다. 그는 바쁜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학구열이 무척 높았다. 뉴욕과 로스엔젤레스에서 주재원으로 미국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하며, 상무이사로 승진해 수출 업무를 담당하던 재미 시절 뉴욕대에서 행정학 석사과정을 수료했고, 로스엔젤레스 페퍼다인 대학에서 경영학 MBA석사를 마쳤다. 그후, 한국으로 돌아와 경희 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8여년간 직장에 성실히 근무하던 그는 1995년 당시 새정치 국민회의 총재 김대중의 제안으로 당시 김대중 총재의 특별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해 1996년 전라북도 진안군, 무주군, 장수군에서 제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18대 국회까지 4선을 역임했고, 2006년 산업 자원부 장관을 맡았었다.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쉽게 당선 될 수 있는 지역구에서 불출마한 뒤 정치계의 격전지이자 서울시 정치 1번지라고 불리는 종로구에서 새누리당 6선 경력의 지명도 높은 홍사덕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승리의 원인으로 종로의 거리거리를 거의 훑으며 빠짐없이 선거운동을 하며 특유의 스킨쉽으로 5천표 이상의 압승을 거둔것이라 분석된다. 이로써 '호남 정치인'이라 불리다 '전국 정치인' 으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게되었다. 이 여세를 몰아 제 18대 대통령 선거때 유능한 경제 대통령 및 가계 부담을 줄이겠다는 공약으로 당내 경선에 출마했으나 문재인 후보에 패했다. 경선 패배의 원인은 카리스마와 대중성의 부족등으로 평가된다.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권주자로 거론되기도 했던 오세훈 후보와 경합을 벌이게 되었는데 초기 여론조사에서 17.3% 의 격차로 크게 밀리며 패색이 짙었고 대세는 오 후보로 굳어졌다는 전망까지 보도되었다. < 종로의 선택! 대한민국을 바꿉니다. 기호 1. 오세훈>이라 쓰인 큰 플랑카드 바로 아래에 < 학교 의무급식 중단없이 맛있게! 기호 2. 정세균 > 등의 인상적이고 유머러스한 슬로건을 내걸어 센스 만점의 선거 운동을 전개해 종로구민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여론조사 결과 17.3% 격차를 2주만에 1%의 초박빙 접전으로 급속히 좁힐 수 있었고 최종적으로 선거에서 52.6%의 지지로 오세훈 후보를 꺾고 종로구 재선을 이루며 반전 드라마라 불리며 6선의 고지를 지키게 되었다. 총선에 연속 6회 출마해 모두 당선됬고, 특히 모든 선거에서 득표율 50%를 넘기는 압승을 거뒀다. 선거기간 정의원은 골목 골목을 누비며 밑바닥 정서를 폭넓게 파고 들었고, 오세훈은 번화가 거리 사거리쪽에서 크고 화려하게 유세를 했었다. 또한, 오세훈 후보는 새누리당의 서울시 선거 위원장을 맡으며 인근 다른 선거구로도 유세를 나가곤 했었기에 종로내에서의 활동은 뜸했었는데 이에 대해 정의원은 "오세훈은 강남 스타일을 하지만, 종로 스타일은 따로 있다"라고 강조했고 종로구 유권자들에게 상당히 호감을 주었다는 분석이다.
20대 국회에서 더불어 민주당 원내 1 당 등극과, 여야 두루 적을 만들지 않는 성품으로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경쟁 상대 문희상 의원을 가볍게 누르고 여유롭게 선출됬다. 그는 대기업 근무 경험, 해외 체류 경험등으로 실물경제와 외교에 능통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의 성품은 온화한 편으로, 화를 내거나 거친 언사를 보인적이 없다. 화려한 정치적 매력을 지닌 스타 정치인은 아니나 조용하고 성실해 정치인생 도중 비리에 연루되지 않고 사생활에서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아왔다. 1년에 한번 기자들의 투표로 당마다 1명씩 가장 신사적인 의원에게 수여되는 백봉 신사상을 7회 수상 할 정도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신사라 불린다.
1997년 4월 12일 한보 사태 특별 청문회 당시 전문 경영인 이 모씨가 유력 정치인들에게 불법 자금을 다 건넸지만 유일하게 안 받은 인물이 정세균의장이라고 발언했다. 정 의장은 당시 초선이기도 했고 스스로가 금전적 욕심이 없다고 하며, 쌍용 그룹 근무 당시 한보 그룹이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한보 쪽 인물과는 아예 교류를 하지 않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의 견해 "국회의원은 취직 자리가 아니다!" 지역구를 여기 저기 돌다가 정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다시 고향을 찾는 정치인도 있다. 그런 분들을 비난할 생각은 아니지만 나는 정계은퇴라는 배수진을 치고 올라왔고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 국회 의원은 취직 자리가 아니다 호구 지책으로 연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하는 게 정치다. 국민이 네 역할이 끝났다고 하고, 정치권에서도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계속 자리를 탐할 생각은 없다. 나도 내 개인 생활이 있기에 정치를 안하면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면 된다.
가정생활
기독교인으로 고려대 재학시절 이화여대 영문과에 다니던 부인 최혜경씨와 만나 화촉을 밝혔고. 단란한 가정을 지키고 있다. 정의원이 대기업 임원, 국회의원, 장관등을 거치는 동안에 부인은 자녀 양육과 가정 살림에만 전념해왔다.
최혜경씨는 유력 정치인들의 부인들 중 가장 조용하기로 유명하며, 과거 2012년 대선 정국에서 조차 좀처럼 외부 공식 활동을 하지 않고, 정 후보가 사정상 가지 못하는 각종 모임을 챙기며 조용히 정의원을 도왔다. 경북 포항 출신의 그녀는 중학교시절 가족과 함께 상경해 진명여고 졸업후 이화여대에 입학했다. 2남 1녀의 막내딸로 유복한 가정에서 곱게 자랐다. 대학 3학년때 친구따라 나갔던 미팅에서 전라도 총각인 정의장의 파트너가 된 것이 인연이었다.
부인에 따르면 그를 처음 만났을때 똑똑하고 미남이어서 호감이 갔다고 하며 집에서는 과묵하다고 전한다. 약속 없이 군대에 간 그를 끝까지 기다려 결혼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그녀는 평범하고 편안한 남편만나 오순도순 여행도 다니며 가정적으로 사는것이 평소 소원이었는데 정치하는 것을 만류한다고 해도 열정이 있기에 그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도록 그냥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는 또한 일에 몰두하는 스타일이기때문에 아이들 양육은 부인이 전담해왔고, 미국 유학중인 딸이 방학기간 한국에 와 있어도 정의장과 함께 식사를 단 한번 만 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도 조찬 모임 장소로 가족을 나오라해서, 정 의장은 손님을 만나고 가족들은 따로 밥을 먹었다고 전한다. 바쁜 와중에 가정에 극도로 소홀 함에도 불구하고 부인 최혜경씨에 따르면 그가 밖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잘 대하면서 집에서는 결혼한 지 30년이나 된 부인을 잘 헤아려 주지 못하곤 하지만 그가 가는 길에서 당당하게 우뚝 섰으니, 사실 최고의 남편이고 아이들이 긍지를 가질 만한 훌륭한 아버지라고 말한다. 정의장은 현재 종로구 숭인동에 거주하며,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때는 보통 가정과 별반 다르지 않게, 차례도 지내고, 가족들과 함께 이른 아침 조찬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일산 본가에 가서 부모님을 찾아 뵙고 인사드리는 등 가정의 주요한 일도 가족과 함께 하려 노력한다고 한다. 정세균 국회 의장의 정치 행보에 대해 여,야 간 큰 이견이 있고, 평범한 한국 국민들이 정치 소견이 다르듯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든, 세계 어느 민족이든 모든 이들의 의견이 통일 된다는 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다.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으로 인해 국가가 세계가 발전하고 있는것이 분명하므로 정치인들과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정 세균의장의 사생활 및 정치행보와 관련해 건강하고 반듯한 삶을 살아오고 있고, 국민의 건강한 정서를 헤치는 상식 이하의 언사를 하지 않았으며 꾸준히 일관된 신사적 모습으로 정치를 하고 있는점이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꿈 많은 젊은 시절 부터 품었던 대한민국의 이상적인 방향으로의 발전을 위해 그의 뜨거운 땀과 지치지 않는 노력이 주요한 밑거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