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주 하원의원 후보 애쉬 칼라 (Ash Kalra

2016 선거 강력 추천 인물
현 산호세 시의원,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전미 대 도시중 첫 인도계 시의원.

산호세 시청사 타워빌딩의 가장 윗층인 18층에 산호세 시의원인 애쉬 칼라(Ash Kalra)의원 사무실에 방문해 칼라 의원을 만났다. 그는 현재 산호세 시의원이며, 이번 11월 선거에 캘리포니아 주 하원의원 후보다. 인도계로서는 전 미 대도시중 처음으로 시의원에 당선된 인물이며, UC 산타바바라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고, 조지 타운 대학(George Town University)에서 법학 박사(J.D.)를 받고 캘리포니아 변호사로 재직하며, 가까운 칼리지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교수였으며, 어려운 환경속에서 범죄에 연루된 사람들의 변호를 맡아주는 국선 변호인으로 11년간 그리고, 지난 20여년간 지속적으로 지역사회에서 많은 봉사를 해 오고 있는 인물이다. 그 의 생각과 삶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더욱 큰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 처럼, 한인 사회를 존중해주는 반듯한 안목의 의원들이 더욱 늘어나길 바라며, 그가 이번 11월 선거에 캘리포니아주 하원으로 꼭 당선되길 바라며 지역 한인들의 관심과 지지를 부탁드린다.
만난사람 발행인 아이린 서.

애쉬 칼라(Ash Kalra)의원은 현재 44세로, 1972년 캐나나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그가 6살이었던 해인, 1978년 그의 부모님과 형, 그리고 남동생등 5명의 가족이 함께 도미했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의 라홀(Lahore)이란 곳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영국이 통치를 포기하고 인도에서 떠났으나 그 지역이 인도와 파키스탄, 이스트 파키스탄등으로 분열되면서 파키스탄 근처에 거주했는데 많은 국가적 혼란상태에 처해 수백만명이 죽고, 살상을 당하던 혼란기 였기에 가족과 친척들이 몇시간만에 피난짐을 꾸려 인도쪽으로 이사를 하게되었다. 이시기가 인도 역사상 가장 대규모 인구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7살때쯤 땔감을 주어와 어느 마당에 다 모아두고 팔면서 생계를 유지 했는데 당시 많은 인도인들이 그렇듯 먹고 살기가 버거운 시기였기에 어리디 어린 7살짜리 소년 조차도 밤에 땔감을 지키기 위해 불침번을 수도 없이 섰었다. 칼라의원은 아버지로 부터 칠흑같이 깜깜한 밤에 7살 소년이 땔감을 지키기 위해 땅바닥에 누워 밤을 새는 시간이 얼마나 무서웠었는지 수도 없이 들었고 그런 상황에서도 열심히 살아오신 아버지가 무척 존경스럽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가 이사했던 곳은 전기조차 없었던 완전 시골이었고, 몇 년이 흐른 뒤 좀 큰 도시로 이주하게되었는데 가난 했지만 아버지가 굉장히 머리가 좋아 공부를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총 7명의 형제 자매가 경제적으로 먹고 살기도 어려운 시기였기에 주변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지만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너무 공부하는것을 좋아해 공부도 계속했다. 그후 아버지는 1968년당시 갓 결혼해 아내와 캐나다 토론토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토론토 대학 (University of Toronto)에서 항공학과(Aeronautics PhD)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아버지가 캐나다로 유학을 떠날당시 조부모께서 평생 모은 전재산을 다 모아 캐나다행 비행기표를 사주셨고, 아버지는 캐나다에 도착 후 독학으로 학위를 마친뒤 핵 과학자로 근무하던 중 베이지역으로 출장을 오셨다가 따뜻한 기후에 살기 좋은 베이지역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해 팔로알토의 전기 에너지 회사에서 핵 개발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때 산호세에 살기시작해 현재까지 거의 대부분의 삶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다.
칼라 의원은 UC 산타바바라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고, 조지타운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후 캘리포니아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해 변호사로 활동했다. 산타클라라 카운티 변호사 협회에서 이사로 몇년간 일했으며, 여러 비 영리 단체에서 다양한 봉사활동을 해왔다. 아시안을 위한 법률 자문, 청소년 선도를 위해 교육계에서 교육자로 근무하기도 했다. 워싱턴 DC 에 있을때 고등학교 선생으로, 산호세 스테이트 대학에서 강사로 근무했었다. 링컨 법과대학에서 법학 교수로도 재직했었다. 또한, 국선 변호사로 11년간 근무했었는데 그때 어려움에 처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가졌다. 그들은 범죄에 연루되었으나 그들을 대변할 변호사를 구할수 없는 처지의 가여운 사람들이었다.
한번은 19살인 한국 소녀하나가 친구들과 파티를 벌이고 지내다 마약을 소지 한 것 뿐 아니라 그 마약을 판매하다 경찰에 적발되어 고발되었는데 칼라의원이 국선 변호인으로 그녀를 돕게 되었었다. 그 한국 소녀는 충격 받으실 부모님께 비밀로 하고 싶다고 했으나, 칼라의원은 동양의 문화에서 부모는 처음에 소식을 접하면 놀라고 실망하겠지만 결국 최선을 다해 딸의 편이 되어 동행해줄 것이라 걱정하지 말고 솔직히 말씀드리라고 했다. 동양적인 문화에서는 부모님의 협력이 난관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녀를 설득해 그녀가 부모에게 사실을 털어놓았고, 그녀의 부모는 놀라고 낙심했지만 결국 끝까지 그녀의 손을 잡고 법원에 동행해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사건 종결 후에도 칼라의원은 그녀에게 멘토로서 여러 조언을 해주 곤 했었고, 그녀가 정상적인 궤도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많이 흐믓했다고 한다.
국선 변호인으로 활동하던 시절 마약에 중독된 아시안이 많다는것을 알게 되었는데, 사실상 아시안의 상황에 적합한 재활 프로그램이 거의 없어서 안타까왔었다. 미국의 마약 재활 프로그램은 대부분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에게 효과적인데, 이민자들이나 동양문화속의 사람들에게 괴리가 아주 컷었다. 사람의 깊은 심리를 꿰뚫고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내고, 그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부터 극복할 결심을 할 수 있도록 대화를 이끌어내는데 어려움이 아주 많았었다.
아시안들은 다른 사람들의 평판, 부끄러움등 보통 미국사람들이 크게 신경쓰지 않지만 아시안적인 사고에서는 큰 문제점이 될 수 있는것들이 다루어 지지 않았다. 이런부분들이 좀 개선 되어 실수로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다시 사회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주변에 아시안이 마약, 도박 문제 혹은 가정폭력등의 고통을 받고 있다면, '지역사회 참여를 위한 아시안계 미국인 협회(AACI, Asian Americans for community involvement, aaci.org)'를 통해 보다 적합한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해 보는것을 추천한다. AACI 에 한국어로된 재활 프로그램이 산타클라라 카운티에서 운영되고있다. 'AARS (Asian American Recovery Service)에도 아시안을 위한 좋은 프로그램이 들이 많이 있다.
칼라의원은 지금 미국에 사는 우리후손들은 너무나 많은 혜택을 받고 있고 우리가 이렇게 살수 있게 된 것은 온갖 난관을 뚫고 살아오신 부모님, 증조 부모님등의 힘이라 생각하며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전한다. 우리가 현재 사는 환경과 우리 부모님이 겪어오신 삶을 비교해 보면 우리들은 전혀 불평 할 수 없다고 한다. 부모님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하나하나 도전해 이룩하셨고 정말 이것은 우리세대가 존경하고 본 받아야 할 훌륭한 점이라 생각한다고 강조한다.
칼라 의원은 한미봉사회(KACS)의 활동을 여러모로 관심을 가지고 보고 동참해 오고 있는데, 다양한 노인 프로그램과 다양한 청소년 프로그램이 공존하고, 또한 노인 분들을 청소년들이 다양하게 돕는 활동이 가장 인상깊고 동양적인 사고에 부합하는 아주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인상깊었다고 한다.
칼라의원은 시의원 전에 산호세 시에서 인권분야 커미셔너로, 또 도시 계획부문 커미셔너로 활동했으며, 산호세시의 자매도시 분야에 포괄적으로 관여해오고 있다. 그는 예의 바른 모습과, 단정한 외모로 시의원 회의에서 상당히 발표력이 뛰어나며, 의견게재시 상당히 논리적이며 따뜻한 인간애를 풍기기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많이 경청하고 동조하는 경향이 짙다.
그는 여러 한인 단체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많은 참여를 하고 있는 베이지역의 대표적 친한 의원이다. 한미 봉사회에서 감사패도 받았으며, 산호세 시와 한국 수원시와의 자매도시 체결을 위해 직접 공청회안건을 2명의 시의원들과 함께 상정하고 여러 시의원들을 설득하고 있다.
우리 한인 청소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조언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청소년들과 그들의 부모님들께 말씀드리고 싶다고 입을 열었다. "아시안계의 부모님들은 미국으로 이민후 생존의 문제가 가장 큰 관건이었고 언어의 큰 장벽에 힘들었기에 자녀들이 언어에 크게 좌지우지 되지 않는 경제적 보상이 큰 직업을 아주 선호해 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의사나 컴퓨터 엔지니어쪽을 무척 선망합니다. 그러나 우리 청소년들에겐 더 많은 '기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청소년들은 이민 1세들이 처했던 언어 장벽이 없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모두 의사와 컴퓨터 엔지니어가 되는 것 보다는 수도 없이 다양한 분야에 뛰어들어 헤쳐나가 자신감을 성취하고 성공해 나갔으면 합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고 성취의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우리 부모님들께서 그들을 믿어주고 용기를 주셨으면 합니다. 아시안들이 보다 다양한 분야로 뛰어들어 잠재적인 실력을 키워나갈 수록 점점 우리 후손들이 더욱 많은 기회와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한인 부모님세대가 겪었던 애환과 비슷한 국가 혼란과 경제적 파탄속에서 애쉬 칼라 의원의 부모가 살아남았고 지독한 정신력으로 원하던 꿈을 향해 도전을 거듭해왔다. 우리 한인 커뮤니티처럼 투표율이 아주 저조한 인도커뮤니티의 일원으로 애쉬 칼라의원이 산호세 시의원에 최초로 당선 된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난관을 극복한 것이 틀림없다. 끊임없이 봉사하며 진심과 열정으로 매진하고 있는 애쉬 칼라의원이 캘리포니아 하원에서 더욱 큰 활약을 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한인사회에 오랜세월 관심을 가져주는 애쉬 칼라의원의 선전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산호세 시청사 젤 윗층 전망좋은 그의 오피스에서 인터뷰를 하며, 그처럼 똑똑하고 반듯한 한국계 시의원이 조만간 한명 쯤 탄생했으면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 해졌다. 우리 후세들 중에서 그가 걸었던 그 길을 걸어가 줄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타나길 고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