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스 다이너 인터내셔널 대표 김만종

12년 5개월의 비법을 간직한 지혜로운 사람
하루 3,000명의 식사를 제공하는 레스토랑계의 롤모델
한국전 참전 용사들의 고마움을 잊지않는 의리의 한인

항상 유머와 유쾌함이 넘치는 김만종 대표와 아내 김정애 여사를 산마테오 카펠리니 레스토랑(Capellini)에서 만났다. 사뭇 소년과 같은 순수하고 환한 미소가 배인 얼굴과 소탈한 성격의 그는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에 로리스 다이너, 골든게이트 그릴, 시어스 푸드-팬케익 전문점, 카펠리니 이탤리언 레스토랑등 8개의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본지와의 인터뷰 제의에 그는 자랑할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다고 말하며, 또 혹시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읽고 누군가가 의도치 않게 상처를 받거나 하면 어떻게 하냐고 한사코 거절했지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싣고자한다. 그는 끊임없이 공부하며, 조용히 지역사회와 낙후된 나라를 찾아가 다양한 봉사활동에 전념하고, 아내와 자동차 여행을 하는게 가장 즐겁다고 한다. 그의 성실하고 겸손하며 소박한 삶을 우리 한인 후세들이 많이 본 받아, 그로 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색다른 도전의식과 개척정신을 배우고 나누며 사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만난사람 발행인 아이린 서

김만종 대표는 6.25 한국전당시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가난하고 배고픈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가 7살 정도 되었을때의 기억이 아직도 또렸하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터벅터벅 먼지나는 길을 걸어 가고 있었는데, 미군을 실은 트럭한대가 옆으로 지나가다가, 잠시 멈춰서더니 타고있던 미군 한명이 환하게 웃으며 뭐라고 말을 건네며 그에게 작은 박스하나를 던져줬다. 엉겊결에 받지 못하고 땅에 떨어진것을 집어서 열어보니 뭔가 하얀게 들어있어서 마셨는데, 그것이 바로 우유였다. 처음 맛보는 고소한 우유가 눈이 휘둥그래지도록 맛있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고 한다. 그 때 부터 미군들이 참 고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후로도 미군들은 스쳐 지날때마다 생전 처음먹어보는, 초컬릿, 과자, 껌 등을 많이 나눠줬었다.

김만종 대표의 아내, 김정애 여사는 간호사 였는데 어린나이에 도미했고, 당시 아시안이 전혀없는 버지니아의 소 도시로 발령을 받았다. 그 곳으로 이사간지 얼마 안되어, 한 백인 부부가 그녀를 만나러 방문했다. 그 백인아저씨는 그녀를 보고는 덮석 손을 꼭 쥐며 너무 반갑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전 당시 한국에서 군복무를 했으며, 당시 수 많은 친구 병사들이 죽는 모습을 곁에서 많이 봤다고 하며, 그 또한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다고 한다. 군 복무를 하면서 무섭고 두려웠지만, 한국을 지켜내야 겠다는 의지가 점점 강해졌고, 자신의 목숨보다도 한국을 지키는것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며 군복무를 마쳤다고 했다.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내가 내 목숨보다 더 아꼈던 대한민국에서 한 여성이 이지역으로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한번 꼭 만나서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 60마일을 달려왔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해 했었고, 그런 그의 마음을 받고 그녀는 너무나 감사했다고 전한다.

김만종 대표부부는 각각 어릴때 경험한 일들을 잊지 않고, 이름모를 미군들에 대한 감사함에 조금이나마 보은을 하고자, 2004년 부터 13년째 매년 6월 25일에 한국전 참전 용사들과 그 가족들을 샌프란 시스코 그의 레스토랑, '골든게이트 그릴'로 초대해 정성껏 준비한 한국 전통 음식을 나누고 다양한 한국의 정서가 담긴 노래와 고전무용등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그는 미국에 처음왔을때가 생생하다고 한다. 홀로 희망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언어도 안되고 수중에 돈도 없었다. 청소를 해주겠다고 한 집에 갔는데, 진공 청소기 사용법을 몰라 청소도 제대로 못하고 몇시간동안 오히려 집을 어지럽히고는 집주인의 화난 얼굴을 대하고 보니 너무 너무 미안했는데 말도 어떻게 하는 줄 몰라 너무 답답하고 몸둘 바를 몰랐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그 이후에 여러가지 일을 밤낮으로 하면서 옷은 구세군이나 플리마켓에서도 제일 싼것으로 몸에 만 맞으면 아무거나 사입으며 한푼두푼 돈을 모았다. 어느정도 돈을 모으면 근처에 있던, 샌프란시스코 대학(University of San Francisco)에 가서 한과목씩 수업을 들었다. 그는 영어를 꼭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잘 전달하고 싶었고, 배워야 희망이 생기고 성공할수 있을꺼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알뜰히 살면서 뭐 할줄 아는것이 없었는데도, 혼자서 일해서 운영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샌드위치 가게를 인수했다. 그때 아주 낡은 트럭을 하나 사서 음식 재료를 직접 사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팔면서, 공부도 계속했다.
어느날 장을 봐서 샌드위치 가게로 향하는데, 갑자기 도로 중간에서 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당황하지 않고 이렇게 저렇게 차량의 기어를 움직여봤는데, 다른 기어는 하나도 듣지 않는데, 오로지 후진 기어만 작동이 됬다. 샌드위치가게를 오픈한뒤 수개월을 단 한번도 지각하거나 문을 닫은 적이 없이 성실히 운영해왔는데, 제 시간에 가게 문을 못열까봐 손님들이 실망 할까 조바심이 났고 어떻게 해서든 꼭 제시간에 가고 싶었다. 기도하는 마음을 갖고 차의 후진 기어를 넣고 뒤로 천천히 가기 시작했다. 옆에서 같이 가던 백인 할머니가 후진으로 달려가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상황을 파악하고는 그 할머니가 비상등을 켜고 그의 차를 뒤에서 보호하며 샌드위치 가게까지 호위해 주어 늦지 않고 가게를 열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 후진 기어로 운전한 구간은 프레시디오근처 프리웨이 부터,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터널과 도일 드라이브지나 약 3마일정도 였다.
그는 남들이 베풀어주었던 작은 호의와 사랑을 항상 되뇌이고 기억해 자신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면서 살아가려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1972년도에 도미해, 80년도에 김정애 여사와 혼인후, 슬하에 남매를 두고있다. 그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자주 말한다. 그가 아내와 36년동안 사이좋게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비결은 항상 아내에게 순종하고, 또 복종하고, 간혹 맹종하고, 결국 그의 이름과 같이 만종하는것이라고 그 비결이라고 껄껄 웃으며 이야기 한다.

또, 처음 아내를 만난날에 대해 상세히 알려준다. 친구의 소개로 현재의 아내를 만날 기회를 얻어, 그녀의 아파트에 방문했다. 당시 아내는 한 여자 친구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가 아파트에 방문했는데 그를 보자 마자 아내와 아내의 친구가 그에게 소파에 앉아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고 집안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는 '아, 내가 손님으로 왔으니 음식을 준비하나보구나!'하고 은근히 기대하고 기다렸다. 10분 20분이 지나도록 안나타나다가, 둘이 방에서 나왔다가 다시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고 또 사라지기를 반복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당시 그는 구세군이나 플리마켓에서 산 제일 싼 옷을 사 입었는데, 노란 낡은 윗옷에, 빨간색 무릎이 나온 큰 바지, 초록색 양말에, 파란구두를 신고 있었고 형형색색의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입고 당당하게 나타난 심각한 얼굴의 한국 남자를 보자 아내와 아내의 친구는 그 촌스러움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방으로 뛰어들어가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동안 웃다가 진정하고 거실에 나왔다가, 그의 모습에 또 웃음보가 터져서 또 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웃었었다고 한다.

그의 아내, 김정애 여사는 "당시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또 재미있고 성실한 그의 모습을 보고 평생 많이 웃으며 살수 있을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고 말한다. 두 부부는 경제적으로 넉넉치 않아도 둘이서 매일 서로 바라보고 별일도 아닌것에 깔깔 웃으며 즐거웠다고 전한다.

지금도 그와 아내는 서로 말을 몇마디 나누다가 소년 소녀같이 순수한 모습으로 활짝 웃곤한다. 둘은 여행을 좋아하는데, 특히 자동차 여행을 한달씩, 짧게는 일주일 혹은 몇 일이라도 떠난다. GPS로 싼 모텔을 찾아 묵기도 하고, 눈 내리는 레잌타호에서 눈사람을 만들기도 하며 소박하고 즐겁게 살고 있다. 딸은 콜롬비아 대학졸업후, UCLA 대학안의 비영리 단체 교육관계된 일을 하고 있고, 아들은 그의 회사에 매니저로 있는데 불철주야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매일 샌프란시스코 회사에 출근하며 시내의 길거리에서 방황하고 누워있는 홈리스들을 볼 때 마다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그들에게 새힘을 줄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들이 자신의 상황을 털고 일어나서 인간으로서 최소한 기본적인 상황속에 살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다.

그는 또한 낙후된 세계 곳곳을 찾아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다. 얼마전에는 혼두라스에 교회의 선교팀에 속해 함께 갔었는데, 그가 어린시절 겪었던 한국의 가난하고 어려운 실상처럼 현재 그나라는 그렇게 어려운 모습을 하고 있다고 전한다. 시골지역에 가서 아이들을 도와주고, 학용품을 나눠주고 음식을 나누며, 메디칼 미션팀들을 도왔다고 한다. 다음에 그곳을 또 방문할 예정인데, 칫과의사 3명정도가 함께 가서 봉사해주었으면 정말 고맙겠다고 말한다. 그곳의 주민과 어린아이들에게 치료와 예방이 아주 시급하다고 한다.

그는 일도 열심히 해서 세금도 꼬박꼬박 성실히 낼수 있어 기분좋다고 한다. 그의 레스토랑의 테이블은 위만 닦는것이 아니고 식탁의 뒷면까지도 깨끗하게 하도록 종업원 교육을 시킨다고 한다. 그는 사업을 운영하면서, 1. 정확성(Accuracy), 2. 정직함(Honesty), 3. 투명성(Transparency) 이 3가지를 주요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는 또한 교육이 정말 우리의 삶에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종업원들과 학생들을 위해 매년 장학금을 수여하는것 또한 기쁘다고 한다. 첫해에는 $1만불을 수여했는데, 올해는 $2만불을 12명의 학생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성장해서 기쁘다고 한다.

또한, 그는 산마테오에 있는 카펠리니 이탤리언 레스토랑의 수익의 20%를 매년 지역의 비영리 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얼마전에 중남미의 수리남에 한국전 참전용사 4명이 살고 있다는 텔레비젼방송을 보고는 그가 받고 있는 소셜 연금 한달치를 베네주엘라 한국 대사관에 보냈고, 이번달에 대사가 수리남에 방문하는 기회에 그분들께 전달해줄 예정이다. 한국인들에 특별히 관심과 애정이 많고 극소수 약자인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을 풀어주고가 수년간 지속적으로 노력해준 마이크 혼다의원의 후원을 위해 모인 한인 60여명에게 최고의 식사를 베풀어주었으며, 한국전 참전 기념비 모금에 10만불 이상을 기쁜 마음으로 기부했다. 자신개인에게 뿐 만 아니라 한국과 한국인에게 정성을 베풀어준 다양한 기관과 사람들에게 항상 보은을 하려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가 말하길 어려서 부터 고생해서 돈을 벌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사실상, 돈은 쓰려고 모으는 것이라 생각하고, 또한 자신만 위해 쓰는것이 아니라 사회와 이웃에게 유익하게 써야 한다고 한다. 그는 그의 나이 또래 한국 남성은 평균 수명이 약 80세이기 때문에 그는 앞으로 12년 5개월 정도 살면 거의 인생이 마감할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나중에 천국에 가려면 그가 현재까지 별로 한일이 없어서 천국 티켓을 사려면 더 좋은 일을 많이 해야한다고 껄껄껄 웃으며 말한다. 그는 말하길 그는 하루 3끼 이상은 절대 못먹고, 그의 아내 또한 그렇다며, 그가 살아가는데 아주 큰 돈은 필요치 않다고 한다. 그가 앞으로 살아갈 12년 5개월 동안 쓸 비용을 계산해 보니까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며 살수 있을것 같다고 한다. 사람이 살면서 언젠가 혹은 곧 세상을 떠난다는 것만 깨닫고 있으면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또 하루 하루 생활이 바뀐다고 그가 강조한다. "관속에 뭘 넣고 싶은가? 아무것도 필요없지 않은가?"라고 그가 말한다. 그의 차에는 암호와 같이 "12, 5" 이라고 적혀있는 종이가 붙어있으며 매월 이 숫자가 줄어가고 있다. 매일 매일 하루를 시작하며 자신의 의지를 각성하고 하루 하루를 모범적으로 바르고 성실히 살아가려 최선을 다하는 그 부부의 모습에 감사와 존경심이 든다.

그들 처럼 열심히, 청렴하고, 순수하게, 그들처럼 그렇게 모범적으로 아름답게 세상을 살다 그들 처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