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선 국회의원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이종걸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손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조카 손자
19대 국회 더불어 민주당의 마지막 원내대표
이종걸 더 민주당 원내 대표를 써니베일에서 만났다. 그는 독립운동가의 자녀답게 열정이 많고, 평생을 끈질기게 노력하며 살아온 인물이다. 특히 화제가 되었던 필리버스터의 마지막 연설자로 나서 12시간 31분간 이어진 연설로 국회 최장 연설자로 기록되는등 강한 의지와 리더쉽을 보여줬다. 지난 2000년 부터 변함없이 한 지역구,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에서 5선을 일궈온 중진 국회의원이다. 북가주 교민들과의 간담회에서 그는 참석한 모든 교민 한사람 한사람에게 먼저 다가와 인사하며 와인을 권했고, 가장 젊은 학생들과 마주 앉아 오랜시간 대화를 나누는등 한국 정치계나 공무원계에 흔히 배어있는 거리감이나 권위의식 없이 인간적이고 따뜻한 모습으로 교민들의 관심을 모았다 .
만난사람 발행인 아이린 서
가족 관계
이종걸(李鍾杰)의원은 1957년 5월 22일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과 둘째 부인인 이은숙 사이에서 태어난 이규동의 아들로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에서 태어났다. 한산 이씨 이은숙은 '서간도시종기'를 썼으며, 한국 독립운동사에 일면을 주체적 입장에서 기록하여 사료로써의 가치를 지닌 사서(史書)인 동시에, 전통적 양반집 부인에 교양과 의지를 절실하게 묘사한 문학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조각에서 수여하는 '월봉저작상'을 받기도 했다. 정치인 이종찬은 그의 사촌 형이다. 이회영과 전처 달성 서씨 사이에서 얻은 차남 이규학의 셋째 아들이 이종찬이고, 이회영의 후처 한산 이씨 이은숙 사이에서 얻은 5남인 이규동이 그의 아버지이다.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을 역임한 성재 이시영의 조카 손자다. 정락경과 결혼해 2녀를 두었으며 세례명 ' 그레고리오'로 천주교 신자다.
생애초반 / 학창시절
그는 서울 덕수국민학교 입학 후 안양으로 이사해 만안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경기중학교 진학을 목적으로 열심히 도서관에 다니며 공부했으나 중학교가 무시험 전형으로 바뀌면서 예원학교 피아노과에 진학했다. 그는 완행열차를 타고 안양에서 서울에 있는 예원학교로 통학했다. 예원학교의 유명한 동창으로는 소프라노 홍혜경, 첼리스트 조영창 등이 있다. 그러나 진로를 변경해 1973년 3월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유신체제 시절에 학교를 다닌 그는 이 때부터 '귀있는 자 들어라'라는 유인물을 뿌리는 일에 가담하는 등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1977년에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 진학 후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종로 경찰서 형사의 주요 시찰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아카데미 운동과, 서울 마포구 지역의 노동자 야학운동에 참여하여 야학 은강학교에서 노동자들을 가르쳤다. 학변자로 입대해 3년간 복무하고 육군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
그 뒤 성균관대학교를 자퇴하고 1983년에 서울대학교 인문2계열에 입학했다. 1987년 31세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업 후 다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공법학과에 3학년으로 학사편입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재학 중 사법시험을 준비하여 1988 년 제30회 사법시험에 응시하여 그해 10월에 최종 합격했다. 1989년 졸업후 사법연수원에 들어갔으며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사회 활동
그는 1991년 변호사를 개업했다. 한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에서 인권변호사로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사법연수원 생활 2년차 때부터는 인권 변호사의 길을 준비했으며, 그 무렵 시민운동가 박원순을 만나게 됐다. 후에 그는 잠시 박원순과 함께 사무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인권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이와 함께 전국연합 인권위원회 위원, 천주교 인권위원회 위원 등의 활동을 했다. 그리고 박원순과 함께 참여연대 설립에 기초를 마련했다. 이종걸은 당시 박원순과 사무실을 공동운영하면서 참여연대의 기초 사항을 작성했고, 1991년 8월에는 최일숙(崔一淑)변호사, 성심여대 사회학교수 이영자(李令子) 등과 함께 '성폭력 특별법 제정 추진위원회' 를 조직하였다. 한편 그는 인권 변호사 생활 중 10년간 교제하던 안양 출신의 정락경과 결혼했다. 정락경은 이화여자대학교 의과 대학 마취과 부교수를 역임했다.
이후 그는 박노해, 백태웅 등의 사노맹사건, 유서대필사건, 등 많은 시국 관련사건과 인권관련사건을 맡아 승소했고, 1993년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일명 우 조교 사건)을 당시 박원순시장과 함께 공동변호인을 맡아 6년간의 법정다툼 끝에 신 교수로부터 500만원 배상하라는 판결을 이끌어 내며 승소했다. 이 재판으로 1998년 여성운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매일 경제 신문사 부설 '머니라인'의 운영위원으로 금융의 흐름에 대한 법률자문을 했고, 현대, 대우, 삼성 등의 기업실무에 대한 법률자문을 했다. 노동분야에서는 건설회사와 전자통신 분야 노동조합의 법률자문을 역임했다. 또한 7년 이상 한국소비자보호원의 소비자법 소비자 인권에 관한 자문변호사로 활동했다.
법제정 분야에서도 활동해 성폭력특별법 제정 및 가정폭력특별법 제정을 위한 범국민 운동본부에도 참여, 여성인권운동 초안을 작성했다. 여성인권운동 초안을 작성한 공적으로 1998년 3월에 열린 한국여성대회에서 '한국여성운동상'을 수상했고 1999년 여성신문사 선정 '여성인권에 가장 기여한 남성 10인'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또한 가정폭력특별법 제정에도 참여했다. 1999년 11월에 새정치국민회의에서 변호사 20인을 영입할 때 조배숙, 정성호 등과 함께 영입되어 이듬해 총선에 입후보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와 역사문제연구소 이사, 운영위원, 사회과학연구소 감사, 천주교 인권위원회 인권위원 등에 위촉되었다. 관공서의 자문역으로는 국립 사회복지 연수원과 국립 보건연구원의 강사, 경찰청 경찰 개혁위원회 위원, 공정거래 위원회 하도급 자문위원 등에 위촉되었다. 강단 활동으로는 공무원 교육원 강사, 서울 시립대학교 세무학과 강사, 미국 보스턴 대학교 객원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의 이사로도 위촉되었다.
정치 활동
반듯한 외모로 한때는 '얼짱 종걸'로 불렸지만, 최근에는 상임위 등 회의에 지각이 잦았던 탓에 스스로 이를 비유해 '정각 종걸'이 되겠다는 각오를 밝힌 바 있다. 성품은 강골 독립운동가의 후손답게 강직하다는 평가가 많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에 소속돼 인권변호사로도 활동한 전력이 있다. 정치 성향에서 중도적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사안별 쟁점들에 대해서는 진보적 성향도 두드러지게 보여왔다.
2000년 4월 제16대 국회의원 (새천년민주당, 안양 만안구)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2002년 당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캠프에서 활동했다. 이때 그는 대통령후보 노무현 비서실 차장이 되었다가 선거 직전인 12 월에는 노무현 후보자 수행실장역을 맡았다. 그뒤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 2004년 4월 제17대 국회의원(열린우리당, 안양 만안구)에 출마, 재선되었고 5월에는 열린우리당 원내 수석부대표로 선출되었다. 또한 2004년 5월부터 대한농구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2008년 5월 제18대 국회의원에 재선되고 8월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위원,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2008년 12월 민주당내 소장파 모임인 민주연대 공동대표를 맡았다. 2009년 7월에는 18대 국회 후반기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2010년초 경기도지사에 예비후보로 입후보하여 김진표의원(수원영통)과 당내 경선을 거쳐야 하나 경선 전 2일전에 사퇴했다. 그러나 김진표의원도 유시민과 당대당 경선후 패배했다. 2010년 6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위원,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2012년 5월 제19대 국회의원에 재선되고 다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위원,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을 겸임했다.
2008년 국정감사에서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던 과정에서 당시 유인촌 문화부 장관 등을 '졸개'라고 비하했다가 논란을 일으켰고, 2009년 4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선 일명 '장자연 리스트'를 공개해 거명된 언론사로부터 명예훼손으로 10억원대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하며 폭발적인 화제가 되었다.
2012년 8월 트위터에서 당시 새누리당 경선 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을 그년으로 칭했다. 이후 비판이 이어지자 '그녀는'의 줄임말이라는 졸렬한 변명을 했다가 추가적인 비판을 받기도 했다. 3년 후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10월 22일 여야 지도부 청와대 회동에서 "아까 뵈니까 인상도 좋으시고, 말씀도 잘하시던데, 예전에 저보고 '그년'이라고 하셨잖아요" 라고 말하며 이 사건을 언급했다. 이 말을 듣자 이 원내대표가 매우 놀라고 당황하며 "그땐 죄송했습니다. 사과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원내대표 취임후 문재인 당시 당대표와 사사건건 대립하며 당직 인사권에 시비를 걸며 대립각을 세워왔다. 특히, 문재인 대표를 향해 '박정희의 유신을 보는 것 같다.' 라고 비판한 것이 큰 구설수에 올랐다. 이때 당시 새정치연합 당원들이 이종걸 대표의 징계를 요청했었고, 윤리 심판원까지 열려 사과했다. 이러한 막말등으로 인해 18대 국회에서 두 차례, 19대 국회에서도 한 차례 국회 의원들에 의해 징계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지난 5월 29일, 더불어 민주당 원내대표 퇴임 기자회견에서 그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겨냥해 "(대통령이 된다면) 국민이 시궁창에 버리는 이름이 될지도 모르겠다. 재앙이다"며 강하게 비난하며 "만약 반총장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될떄와 퇴임 할 때의 지위는 하늘과 땅 차이 일것"이라 여당을 향해 날선 비판을 했다.
필리버스터 (filibuster) = 무제한 토론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필리버스터는 의회 운영 절차의 한 형태로서, 입법부나 여타 입법 기관에서 구성원 한 사람이 어떤 안건에 대하여 장시간 발언하여 토론을 포기하고 진행되는 표결을 지연하거나 완전히 막고자 하는 행위다. '필리버스터'라는 말은 1851년에 처음으로 쓰였다. 이 낱말은 에스파냐어 '필리부스테로'(filibustero)에서 나온 말로, '해적' 또는 '도적'을 뜻하는 말이다. 또 이 낱말은 원래 프랑스어 '플리뷔스티에르'(flibustier)에서, 또 네덜란드어 ' 브리부이터'(vribuiter, '도적')에서 유래한 말이다. 당시 '필리버스터' 란 표현은 미국에서 보통 미국 중앙 정부를 전복하고자 하던 남부 주의 모험가들을 이르는 말이었으나, 토론을 전횡하는 방식이 이와 같다고 여겨져 의사 진행 방해자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국회법 제 106조의2에 의거하여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서명한 요구서를 의장에게 제출한다면 가능한 합법적 행위이다. 2016년 2월 23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테러방지법을 대한민국 제340 회 국회(임시회) 본회의에 직권상정하자, 야당은 표결을 막고자 52년 만에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를 시작했다.
이종걸 의원은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을 위한 본회의에 앞서 진행된 더민주 의원총회에서 직접 필리버스터 아이디어를 내고 주도했다. 대부분의 의원들은 52년 만에 정치권에 불쑥 재등장한 개념에 의아해하며 부정적인 반응 이었으나 그는 "필리버스터는 테러방지법의 문제를 국민에게 효과적이고 합법적으로 알리는 국회가 권장하는 수단"이라며 의원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한 끝에 이를 관철시켰다.
막상 필리버스터가 시작되고 폭발적인 반응이 나오자 이 원내대표는 지난해 5월 원내대표 취임 이후 제일 잘 한 일이라는 당 안팎의 칭찬까지 받았다.
그는 국회 본회 의장을 가장 오랜 시간을 지켰으며, 필리버스터의 마지막연설 주자로 나서 오후 7시 32분, 총 연설시간 12시간 31 분으로 국회 연설 시간 최고 기록을 경신하며 모든 필리버스터 참여 의원들에게 노고를 전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이 의원은 이번 필리버스터로 인해 이번 총선에 승리를 했고, 정치인으로서 개인적으로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할어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더욱 우리 조국이 발전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종걸의원은 대권 도전과 관련된 질문에 깊이 생각 해야 할 부분, 고민해야 할 분야이기 때문에 국민의 의견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신중히 생각을 해 봐야 할 사안이다라고 여지를 보였고, 북가주 교민들의 환대에 감사하며, 고국의 발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언제나 지원을 해줄것을 간곡히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