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수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인권 변호사 크리소스토모 G. 이바라

이철수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인권 변호사 40여년간 이민 사회의 7개국어에 유창한 커뮤니케이션의 달인

크리소스토모 G. 이바라

활짝 미소짓는 환한 모습이 인상적인 크리소스토모 G 이바라(Crisostomo G. Ibarra)를 팔로알토 그릭 레스토랑 에비아에서 만났다. 그는 한인사회에 깊은 애정을 갖고 지난 40여년간 한인들을 비롯해 아시안사회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필리핀계 미국인이다. 그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태어나 살다 열 다섯살 때 가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왔고, UC 버클리대학 졸업후 샌프란시스코 UC 해스팅스 법대를 졸업해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억울하게 사형언도를 받고 복역중이던 이철수의 구명운동에 랑코 야마다 변호사와 함께 앞장서서 아시안으로서 미국사회에서 받고있는 불이익에 항거하며 이철수의 무죄확정 판결시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는 영어, 필리핀어 뿐 만 아니라 중국어,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등 7개 국어에 유창한 특별한 인물이다. 그는 안중근 의사를 아시아의 영웅이라 믿고 존경하며, 중국 하얼빈에 개관한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의 삶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필리핀 역사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보게되는 계기가 됐다.
만난사람 발행인 아이린 서

크리스 이바라 대표는 1982년부터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로 활동해오고 있다. 현재 이바라 전문법률 법인의 대표로 재직하며, 미국 뿐 아니라, 캐나다, 필리핀, 아시아, 유럽등의 법률그룹과 제휴해 다국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민법, 가정법, 소송, 국제거래, 장애인법, 유언검인법, 고용법, 상표법등 법률적인 분야 뿐만 아니라, 교육, 인적자원, 국가 기반체계 개발, 재활용 에너지 관련 비지니스 컨설팅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아시아 비영리 단체에서 각종 봉사활동뿐 아니라 아내와 두딸과 함께 선교 봉사활동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그는 부지런하고 정열적으로 일에 전념해 굵직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성공리에 수행해오고 있다.
창업 비지니스 컨설팅 그룹의 이사로 교육, 건강관리, 비지니스 프로세스 아웃소싱, 교육기관들 즉, 대학이나 비영리 단체들의 계약 체결 개발업무등을 수행했다. 또한, 오클랜드시와 필리핀의 원활한 교역사업에 관여했으며, 타이페이, 마닐라, 프놈펜, 상하이의 비지니스 교육과 네트워크 컨설팅을 수행했다.

필리핀내에서는 의료분야 인적자원들을 아시아와 캐나다등지로 파견하는 업무컨설팅과, 의료와 간호부분의 교과 과정의 체계적 시스템화에 관여하고 있다.

캄보디아에서는 법률컨설턴트로 홍콩주재 기업인 '괌 파이낸셜 경영기업'의 국제 건강 보험을 정착시켰으며, 여러 에너지 개발프로젝트, 텔레콤 라이센스 체계화등에 관여하며 캄보디아의 기반체계 발전에 노력해오고 있다. 또한 캄보디아 관광 사역에 법률 고문으로 활동했다.

중국과 홍콩에서는 홍콩의 괌 캐피탈 재정 관리회사와 일을 하며 중국 과 홍콩의 각종 기업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등을 수행하고 있다.

한편, 샌프란시스코 I.I.C.(Intercultural Institute of California) 코리안 센터에서 2005년부터 2009년까지 보드멤버로 왕성히 활동했으며, 2010년부터는 법률/사업 고문으로 끊임없이 봉사하고 있다.

대륙을 넘나들며 나라와, 기업, 그리고 사람들에게 다양한 도움을 주고 있는 크리스 이바라 대표를 UC 해스팅스 매거진에서 2013년 봄호에 <어메리칸 드림 메이커>로 특별히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과 다른 대륙을 잇는 이민법, 상법, 가정법, 고용법, 상표법 전문변호사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그의 고객들중에는 탁월한 학자, 운동선수, 예술인등이 특별한 능력자들을 위한 비자를 받은 경우가 종종있다. 월드컵에 나갔던 나이지리아 축구선수나 스미소니안 박물관에 소장된 작품을 그린 브라질 예술가등이 그런경우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객들은 전세계에서 어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으로 입국하는 꿈많은 평범한 이민자 들이다. 그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살다가 열 다섯 살때 회계사인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과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왔다. 당시 아버지에게 정치적인 파란이 예견되었던 상황이었기에 이민길에 오르게되었다.

그가 이민온 시기였던 1965년부터 69년사이에 미국은 아시안들에게 이민문호를 개방 했었고, 그는 필리핀의 명문학교인 제숫 중국학교(Jesuit Chinese School)의 혹독한 교육과정을 받고 있었기에 당시에 이미 필리핀어, 중국어, 그리고 영어에 유창했다. 이로 인해 이민 초창기에 남들이 많이 겪는 큰 어려움이 거의 없었음에 감사하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회계사로 근무했으며 생선요리를 좋아하신다. 어머니는 육식을 많이 즐기셔서 비교적 젊은나이에 돌아가셨다. 그는 천주교가정에서 자랐고 현재 가족 모두가 독실한 천주교신자다.

한국 문화를 처음 접한것은 마닐라에서 고등학교 재학시절 삼촌이 국제 행사에서 시큐리티 팀 리더였기에 컨퍼런스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고, 행사에 참여한 한국인으로 부터 한국 국기를 선물 받고 한국이란 나라에 아주 친근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UC 해스팅스에 재학시 여성과 소수인종들에게 입학을 제한하는 학교정책에 항의하는 운동에 가담했었다. 이 운동은 그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아시안 법률 간부회(Asian Law Caucus)에서 검토한 결과 연방법에 위배된다는 것을 조사하면서 시작했고 2개월간 강력한 시위가 계속되 학교가 폐쇄되기도 했지만 결국 승리해 학교의 불합리적인 차별정책을 제지할 수 있게 됬다.

그는 동남 아시아에 정기적으로 출장을 다닌다. 그는 그 곳에서 지역 기반체계를 개발하는 회사들에 컨설팅을 하고있다. 또한, 그는 UC 해스팅스 대학과 함께 타국의 법대학생, 판사, 변호사등이 수업에 참여할수 있도록 개방한 방문 학자프로그램을 정착시켰다.

재학시절부터 여러 언어에 관심이 많아 다양한 언어를 배우기 위해 각 언어당 1~2년씩 꾸준히 공부해 현재는7개국어에 유창한 그는 아시안 문화유산을 지키는 사람들과 비지니스 전문 지식인들을 위해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억울한 사형수 이철수 사건은 이경원 대기자에 의해 신문에 대서 특필 되면서 미국내에서 큰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었고, 이철수 친구의 동생이었던 랑코 야마다가 이철수의 억울함을 대변하기 위해 UC 해스팅스 법대로 진학을 한후 학교에 함께 재학중이던 크리스 이바라 대표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아시안의 인권보호를 위해 랑코 야마다와 함께 인권 변호사로서 이철수 구명운동(Free Chulsoo Movement)에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필리핀계 미국 인인 크리스 이바라 대표는 아시안은 하나라고 생각해왔으며 관심을 갖고 서로 돕고 단결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또한 아무리 바쁘더라도 각종 사회봉사 활동을 지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해스팅스 법대에서 소수 민족들의 입학에 차별을 두었을때 항의 할 수 있었고, 또한 이철수의 억울함에 분개해 새크라멘토에서 수시로 이뤄진 이철수 구명항의 시위에도 적극적으로 동참 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아시안 역사와 문화를 소중히 여기며 관심을 많이 기울인다. 한국의 안중근 의사는 아시아의 영웅이며 관심을 많이 갖고 있었기에 바쁜 가운데서도 특별히 시간을 내서 2박 3일에 걸쳐 홍 순경 전 코리안센터 이사장과 함께 최근 개관한 중국 하얼빈의 안 중근 의사 기념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크리스 이바라 대표의 사진(페이지 16 의 첫번째 사진)에서, 뒤의 벽에 걸려있는 그림에 필리핀 전통셔츠를 입고 있는 사람이 그의 할아버지인 에피화니오 귈러모(Epifanio Guillermo) 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1910년대와 1920년대에 두번 농장노동자로 왔었다.

2010년 까지 이 사진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레나토 콘스탄티노란 작가가 저술한 스페인 식민시절부터 세계 제 2차 대전 까지의 역사를 싣고 있는 '필리핀의 역사'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작가는 퍼스티노 필리핀 혁명군의 대령인 퍼스티노 귈러모(Faustino Guilermo)에 대해 썼는데, 미국식민주의자들에 대항해 마닐라를 방어하기 위해 1989년부터 1903년 까지 15차례의 전투를 치뤘고 모두 승리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선한 대령이 었기에 미국식민주의자를 돕는 필리핀 스카웃이란 원주민군 포로들을 한 민족으로서 풀어줬었다. 이로 인해 그는 잡혀서 감옥에 갖혔다가 미국인 판사 3명과 필리핀 판사 3명에 의해 필리핀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뒤 1904년 5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97년이 지난후 필리핀 국가 기념일인 2001년 6월 12일 대통령 아로요가 퍼스티노 귈러모 대령을 국가 영웅으로 복권시켰다.

1899년부터 1946년사이 미국 식민시절 당시 필리핀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크리스 이바라 대표의 할아버지인 에피화니오 귈러모가 아주 가까운 친척이며 미국 식민통치하에서 식민에 반항하는 주요 인물인 퍼스티노 귈러모 대령과 같이 마닐라 샘팔록에 살면서 직장과 삶에 위험과 두려움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결혼해 4 자녀를 두었는데 자녀들 모두 이러한 사실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정치적 문제를 언급해 사회로 부터 나쁜 편견으로 불이익을 받게되는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크리스 이바라대표 부인의 증조 삼촌은 '안토니오 루나(Antonis Luna)' 장군인데, 2015년 '헤네랄 루나(Heneral Luna)'라는 영화로 그의 삶이 조명되었다. 안토니오 루나는 필리핀과 미국전쟁당시 필리핀 혁명군의 장군이었다. 그는 미국 식민군에 저항했으나 최초 필리핀 공화국의 군 총사령관이었던 1899년 6월 5일 암살 당했다. 안토니오 루나는 굉장히 유명해 졌으나 퍼스티노 귈러모 대령만큼 훌륭한 전투 공적이 많지는 않다. 이 영화는 88회 아카데미 수상의 최고 외국영화 필리핀부문에 선정되었었다. 이 영화는 필리핀의 역사영화상 최대 제작비인 8천만 페소의 예산이 소요됬고, 2015년 9월 29일 필리핀 역사영화상 최고 흥행액인 16천만 페소를 넘어섰고, 10월 11일에 24천만 페소에 달해 사용된 모든 비용을 회복하고 흑자로 돌아섰었다. 필리핀에서 전 국민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는 역사영화다.

크리스이바라 대표는 필리핀 독립투사이며 국가 영웅인 퍼스티노 궐러모 대령의 후손이고, 부인역시 독립군 수장인 안토니오 루나의 후손이다. 조상의 훌륭한 애국심을 이어받아, 그와 아내, 그리고 인형같이 깜찍하고 예쁜 두 딸모두 아시안들의 삶을 향상시키는데 개인적인 시간을 많이 할애해 봉사를 지속해오고 있다.

한인들도 모든 아시안인들을 향한 시각을 넓히고 함께 어우러져 노력하며 이 사회에서 발전해 나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