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20세기에 가장 탁월한 언론인 이경원

펜 하나로 사형수를 자유인으로 불의를 간파하고 분노하는 진정한 언론의 선각자 이경원 대기자, 자랑스러운 우리 한인

전설적인 아시안 언론계의 대부로 불리는 이경원 선생을 산타클라라 데니스에서 만났다. 만난 첫 순간 부터 잠시도 쉼 없이 세계역사, 정치, 문학, 경제, 인물등을 총 막라해 꿰뚫고 있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특별한 취재경험들, 타고났다고 밖에 표현 할 수 없는 빠른 속도의 통찰력있는 언변에 연신 감탄하며 4시간 이상을 석상처럼 앉아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었다. 그는 특유의 크고 경쾌한 목소리로 "Isn't it amazing(대단하지 않습니까)?"를 연발하며, 사회의 모든 현상에 대해 감탄과 기쁨을 표현했다. 그가 내게 수없이 "Stupid(어리석다)!"라고 호되게 꾸짖어도 정말 기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87세라고 도저히 믿기 어려운 천진 난만한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이 살아 꿈틀대는 천재적인 언론인이며, 정의로운 한국인인 이경원 선생을 만날 수 있었던 그 짧은 순간의 흥분과 감동은 내게 잊혀질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만난사람 발행인 아이린 서

이경원(87, Kyung Won Lee)선생은 동양인으로는 최초의 미국 신문기자이자 인권 운동기자다. 미국 주류언론의 저명한 사건기자로 맹활약을 펼쳐 미국인들이 크게 존경하고 있는 분이다. 폭넓은 계층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가 미국 역사상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부정 폭력 기자며, 미국 사건기자의 세계를 새롭게 개척한 분이기 때문이다. 언론계 명예의 전당으로 꼽히는 워싱턴 근교 '알링턴 언론 기념관'에 1997년 20세기가 낳은 가장 훌륭한 기자 5백명의 명단에 이경원 선생이 당당히 선정되었으며 그는 "세상을 바꾼 20세기에 가장 탁월한 언론인"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로 이경원 선생은 한인으로는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대기자'의 호칭을 얻게 되었고, 이는 한국인으로서 무척 자랑스러운 일이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사회 문화에 공헌한 해외 동포 공로 훈장도 받았다. 일반 기자로서는 평생 한 개의 상을 받기도 어려운 실정인데도 학계, 언론계, 법조계 등 각계각층으로부터 무려 31개 이상 상을 받은 미국 기자로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유명한 존재가 되었다.

그는 1928년 개성에서 아버지 이형선과 어머니 김순복 사이에 태어났다, 해방후 고려대학교 졸업후 1950년 도미해 웨스트 버지니아대학을 다녔고, 일리노이 주립대학에서 언론학 석사를 받았다. 재학시절 '코리아 메신저(Korea Messenger)'를 발행한 이경원은 졸업 후 신문기자 생활을 하며 미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영자지 '코리아 타운'을 직접 발행하고 LA 에서 발행된 한인의 유일한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즈'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그가 경찰 기자로 근무하면서 병원의 사건 사고취재를 가게 될 일이 많았는데, 병원에 근무하던 잉그리드 버그만같이 아름답고 상냥한 간호사 페기 플라워를 보고 첫눈에 반해 구혼했고 결혼해 자녀들을 낳고 손자 손녀도 있다. 몇 해 전 사랑하는 아내 페기가 하늘로 떠난 뒤 평생 따뜻하고 자상한 그녀로 인해 행복한 인생을 보냈었다는 것을 깊이 절감했다고 한다.

이경원선생의 실로 다양한 활약상 중에서도 "이철수 사건" 과 1992년 4월 29일 LA 폭동사건"의 취재는 우리들의 마음에 가장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이철수(Chol Soo Lee) 사건"

1977년 이경원 기자는 샌프란시스코 중국갱단 우두머리인 입이택을 살해한 혐의로 감옥에 무기징역으로 투옥되었다가, 감옥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다른 죄수를 죽이게 되어 샌퀜틴 감옥의 사형수로 복역 중이던 한국 교포 이철수군의 사연을 접하게 된다.

이철수군은 동양계 부랑아인데다가 살인사건 현장 가까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명확한 증거도 없이 체포돼 적절한 변호인도 없이 투옥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얼마 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갈 17세 한인 소년이었고, 이경원 기자는 그를 인터뷰해, 6개월간 다방면에 걸쳐 사건을 파헤쳤다. 1978년 1월 29일 이경원 기자는 '새크라멘토 유니언'지1면에 "차이나타운 살인사건 속의 앨리스 (Alice-in-Chinatown Murder case)"라는 제목으로 이철수 재판은 잘못됐다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가 AP 통신을 비롯한 미 전 언론의 보도로 이어졌고, 이경원 기자는 이철수 사건과 관련해 장장 5년동안 120여편의 시리즈 기사를 끈질기게 연재하면서 '이철수 구명운동'이 시작되어, 범 아시아계 인권 변호사들이 함께 협력해 결국 이철수군이 사형수에서 자유인으로의 무죄 석방됐다. 당시 미국의 전 언론에서 이경원 대기자의 이 쾌거를 일제히 보도함으로써 많은 미국인들이 'K. W. Lee"를 존경하게 됐다.

이 사건은 뿌리 깊은 백인 우월주의 사회에서 무고한 한 한국인의 진실을 밝혀주는 사건임과 동시에 150년의 동양인 소수민족 이민사에서 처음으로 이루어낸 범 아시아계 정치 운동의 성공이었다. 이 사건은 1989년 제임스 우드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주연의 '트루 빌리버(True Believer)'로 영화화 되어 큰 관심을 모았다. 이경원 선생은 말한다. 처음에 이철수 사건을 취재해 기사를 쓰겠다니까 가장 심하게 반대했던 건 바로 주변의 친구들이었는데, 일개 갱에 불과한 사람을 왜 도와야 하냐고, 그럴 시간에 미래를 위해 머리 좋은 하버드생을 키우고 도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경원 선생도 초기엔 이철수 사건에 관심이 크지 않았었는데, 직접 취재를 해보니 그가 억울한 희생양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가 처한 불의의 상황에 분노가 치밀었다고 한다. 그가 말하길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점이 있는데, 우리의 한 아이가 행복한 가정에 머무느냐, 거리의 부랑아로 전락하느냐는 데 무슨 큰 차이가 있는 게 아니라고 한다. 이민생활에서 바쁘게 맞벌이를 하면서 홀로 남겨진 우리 아이들이 가정을 택하느냐, 거리를 택하게 되느냐 하는 건 순간이라고 한다. 하버드생과 이철수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둘 다 똑같은 우리의 소중한 자녀들이라고 말한다.

"한인 이민 사회의 최대 수난이었던 LA 4.29 폭동 의 진상"

한인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앗아간 "1992년 4월 29일 'LA 폭동사건'에 대해서 그 원인과 사건 전개에 관해서 많은 보도가 있었다. 미 언론의 보도상 이 폭동은 재판의 결과에 불만을 품은 흑인들의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보도한 이경원 기자는 미국사회에서 오랫동안 빚어져 온 흑. 백 갈등을 한인과 흑인간의 소수민족 갈등으로 돌리려는 백인들의 기도에서 온 것으로 목소리가 없는 한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한다.

폭동이 발생했을 때 이경원 선생은 간 이식 수술을 받기 위해 UCLA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병원 침상에서 신문사 기자들에게 전화로 지시를 내리면서 4.29폭동 취재를 진두 지휘했다. 당시 '코리아 타임즈'에 인종차별과 한.흑 갈등에 대한 미국 언론들의 편견에 강한 이의를 제기하며 전격적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폭동 당시 4일 동안 계속된 무차별 습격 과 방화 등으로 2,000 여개의 점포가 초토화되고 잿더미로 변했다. 많은 성실한 한인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그들이 평생 이뤄온 꿈이 하루 아침에 모조리 짓밟혔다.

이 경원 선생은 LA 폭동이 일어나기 3년 전부터 LA 타임즈 같은 미국 언론들에 한인과 흑인의 갈등 관계를 실은 기사들이 종종 실린 것을 보며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고 느꼈다. 미 언론에서 한국인들은 야비하고 탐욕스런 민족이라 비하하면서 흑인들과의 마찰을 조장했다. 그리고 그 폭동 사건 당시 백인들은 그 사건을 왜곡하거나 방조하면서 키웠고, 한인들은 절대 그 진상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황금빛 지붕(Golden Dome)" (캘리포니아 부패한 공무원 연금법 폭로 사건)

이경원 선생은 캘리포니아 주 의원들과 판사를 포함한 공무원들이 자신의 '은퇴연금법'에 납세자들 모르게 은근슬쩍 연금을 올려 놓은 사건을 "황금빛 지붕(The Golden Dome=캘리포니아 주 정부 청사의 별명, 청사의 지붕 색깔이 금빛)"이라는 제목으로 몇 달에 걸쳐 연재했고 이 기사는 수많은 라디오 토크 쇼의 주제가 되어 부패한 공무원과 권력자들을 사칭하는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당시 주지사로 막 당선 됐던 '로널드 레이건'(후에 대통령이 된 Ronald Reagan)은 '은퇴연금법' 관련 기사가 수 차례 보도된 후 시민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특별회의를 소집했고, 주 의회는 결국 전임 팻 브라운 주지사(Governor Pat Brown) 시절 자기네가 몰래 통과시켰던 이 법안을 다시 폐기해 원점으로 돌려놓을 수밖에 없는 수모를 당했다. 미국시민들은 아직도 그 기사로 인한 개혁의 혜택을 누리고 있으니 언론인으로서 이경원 선생의 활약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정말 놀랍다.

이 기사로 이 경원 대기자는 '퓰리처상(Pulitzer Prizes)' 후보에 올랐을 뿐 아니라 '퓰리처상'에 버금가는 미 프레스 클럽(Press Club) 주관 "내셔널 헤드라이너즈(The National Headliners)상을 받아 전 미국 기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며 일반 미국시민들 사이에 큰 존경을 받았다.

"캘리포티아 프레스노 샌 아퀸 밸리 의 삶"

이경원 선생은 캘리포니아의 필리핀 농부들의 서글픈 생활을 역사적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수많은 필리핀 농부들이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노예 아닌 노예로 살다가 외롭게 생을 마치는 애환을 그린 드라마 같은 글이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사람들이었으며, 어려운 환경에서도 사랑을 베풀 줄 알며 어려운 환경의 한인아이를 입양까지 한 사람도 있어 이경원 선생은 그 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한다.

이경원 선생은 날카로운 통찰력을 바탕으로 미주 한인사회의 상황을 망설임 없이 짚어나간다. 한인사회가 변화해야 할 때라고 하며, 한인 부모들이 간판과 학력에 집착하고 육체노동을 경시하는 낡은 생각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말아야만 한인 이민사가 바로 설수 있다고 전한다. 한인 2세들의 성공을 10%의 성공이라고 명명하며, 부모들의 강압적인 일류병 때문에 개인적인 성공에만 의미를 부여하고 사회적인 책임은 부담스러워하는 한인 2세들이 많이 배출되면서, 성공한 10%의 한인들은 한인사회를 외면하고 단절을 자처하고 성공하지 못한 90%만 한인사회에 남게 되는 현상이 한인사회가 풀어가야 할 큰 숙제라고 지적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인커뮤니티는 미국 속의 지하산맥과 같다. 우리에겐 파워가 없고,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의 모든 외침이 워싱턴 DC에서 흡수되고 미국을 움직이는 파워로 변하게 된다. 즉, 미국인들의 정치적 외침은 온 천지 가득한데 우리 한인들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인 1 세대는 침묵과 희생의 세대였으나,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의 후세들은 운명적으로 소리를 높여 나가야 한다고 재차 강조해 말한다.

그는 잠을 거의 자지 않는다. 출판을 기다리는 책들이 즐비하게 있으며, 밤새도록 읽고 생각해도 더 써야 할 글들이 그의 가슴속에 가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닿고, 그의 인생은 한편의 드라마 같기도 하고, 치열한 전쟁터였으며, 오래 오래 기억될 예술작품과 같다. 그가 사는 새크라멘토에 문득 문득 달려가 이경원 선생으로 부터 더 많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