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령 - 에모리 로스쿨 법학도

농구와 스킨스쿠버를 즐기는 가야금과 클라리넷 전문 연주자

김재령씨는 현재 에모리 법대에 재학중인 재원이며, 7월 20일 오후에 샌프란시스코 저널 오피스에서 만났다. 그는 174cm 의 훤칠한 키에 패션모델처럼 늘씬하게 곧은 긴 다리, 건강한 피부색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그의 소탈한 성격과 서글서글한 미소가 긴 여운을 남긴다. 그는 어릴 때 버클리 지역에서 거주했었고, 현재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 로펌에서 인턴을 하고 있다. 다양한 스포츠와 악기 연주를 즐기는 다재 다능한 재원이다. 만난사람 발행인 아이린 서

1. 간단한본인소개

김재령. 영어로는 Jae Reong Kim, 혹은 Jaelyung Kim 이라고 씁니다. 미국 친구들은 저를 부를 때 Jaelyung 을 줄여서 Jael 제이엘 이라고 하고요. 서울에서 태어나 쭉 자랐습니다. 교수이신 아버지를 따라 어렸을 때 뉴욕과 버클리, 그리고 프랑스에서 학교를 다녔었고요. 중학교 때 부터는 한국에서 생활했습니다. 숙명여고와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국회 입법조사처에서 일을 하다 에모리 대학교 로스쿨에 유학을 왔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진취적이고 자상하시고, 어머니는 따뜻하고 현명한 분이십니다. 저에게 항상 져 주는 착하고 똑똑한 오빠와 함께 자유로운 분위기의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저와 오빠가 어렸을 때부터 항상 공부가 아닌 다양한 경험을 쌓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덕분에 피아노는 물론이고 클라리넷과 가야금을 능숙히 다룰 수 있게 되었고, 무용과 리듬체조, 농구, 탁구, 스케이트, 수영, 그리고 스킨스쿠버 등 다양한 스포츠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어렸을 때 다양한 악기와 운동을 배워둔 덕분에 요즘에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나 그저 내킬 때마다 취미로 즐기곤 합니다.

2. 어린시절의꿈, 기억나는추억

제가 11살일 때, 버클리에서 살다 한국에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기 한 달 전, 밴을 빌려 가족과 함께 road trip 을 했었는데,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이켜 보면 그 때 가장 행복했습니다.
한 달간 서부 약 8개 주와 Canada를 차로 돌아다니며 캠핑을 하였는데, 여러 국립공원의 아름답고 푸른 자연과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을 보았고, Utah의 달려도 달려도 끝 없이 펼쳐진 모래사막을 건넜습니다.캐나다의 Rocky Mountains 를 보며 그 웅장한 산과 함께 잠들곤 하였습니다. 한 달을 여행하면서 Las Vegas 에 있을 때 말고는 항상 캠핑을 하였는데, 나중에는 가족이 모두가 프로 캠퍼들이 되어 캠핑 사이트에 도착하면 아빠는 등록 및 이불 정리, 엄마는 저녁 준비, 오빠와 저는 텐트 세우기를 맡아 하였습니다.
가족이 똘똘 뭉쳐 한 팀이 되어 즐겁게 여행을 다닌 기억이 현재 제가 힘든 때에도 항상 저를 든든히 지탱해 주는 것 같습니다.

3. 지금직업을갖게된계기, 주요멘토나에피소드?

대학교 때 삼성의료원 봉사단과 함께 몽골로 의료봉사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의사선생님, 간호사선생님, 그리고 저와 같은 학생들로 구성된, 약 20명 정도 팀이 몽골 고비사막으로 가서 유목민들에게 무료 의료서비스를 제공했었죠. 의료 서비스로부터 단절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우리로 인해 고마워하고 행복해 하는 것을 보았고, 새 삶의 잉태에 함께하는 동시에 죽음을 목도하곤 했습니다. 그 때 느꼈던 것 같습니다. 나에게도 뭔가 전문화된 능력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 참 흐뭇하겠다, 라고요.
이후, 졸업을 앞 둔 저에게는 두 가지 옵션이 있었습니다. 취직 준비를 하느냐, 아니면 대학원에 진학을 하느냐. 그 갈림길을 놓고 저는 잠깐 고민을 하며 각각 옵션에 들이게 될 노력, 그리고 그걸 성취한 이후 저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취직이나 학업이나 비슷한 노력을 들여야 했습니다. 여느 회사에 취직을 하려 해도 시험을 봐야 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려 해도 시험을 봐야 하니까요. 그래서 그 다음으로, 비슷하게 노력을 해서 제가 성취하게 될 삶 중 어떤게 저를 더 행복하게 해 줄지 생각해 봐야 했습니다. 이 때 몽골에서의 기억이 생각났습니다. 막연히 "전문직"이 갖고 싶었습니다. 제가 가진 노력을 통해 남들에게 베풀 수 있는 삶을요. 어차피 봉사도 부분적으로는 자기 만족이니까요.
처음에는 그저 미국에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살았던 기억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죠. 또한 미국의 보다 진취적이고 얽매이지 않은 분위기도 그리웠습니다. 버클리에서 살 때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클라리넷을 했는데, 학교에 온 첫 날 클라리넷을 불어보라고 시키더니 나이, 학년, 서열을 무시하고 이제 막 한국에서 온 어린 신입생인 저를 파트장으로 앉히는 것을 보고 느꼈던 점이었습니다. 그래서막연히 미국 로스쿨 준비를 하였는데,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을 미국에 보내기 싫으시다며 그런 저를 내심 탐탁지 않아 하셨습니다. 그러나 막상 학교들로부터 합격통지서 및 장학금 수혜내역 안내서를 받자 아버지가 제일 기뻐하시며 저를 유학길에 선뜻 보내주셨습니다.

4. 현재 직업의 힘든점 과 좋은점?

로스쿨생들은 여름에 인턴을 해야 하는데, 저는 이번 여름 첫 두달은 Superior Courts of Georgia, Griffin Judicial Circuit 에서 네 명의 판사 아래에서 judicial intern을 하였고, 현재는 San Jose 의 Valencia, Ippolito & Bowman 이라는 로펌에서 한 달간 인턴을 하고 있습니다. 법원에서는 판사의 지시 아래 판결문을 쓰거나 각종 모션을 처리해야 했는데, 가장 힘들었던 점은 한 쪽에 치우쳐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당연히 한 쪽의 편을 들어 판결을 내려야 하지만,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는 제3자의 입장에 서서 모든 증거와 사실관계를 판단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5. 인생에 중요한 점은?

가족. 가족들과 함께 한 시간이 현재 저의 유학생활을 든든히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6.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혹은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어떻게 극복했는지?

어렸을 때 자주 이사를 다니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덕분에 다양한 경험을 하며 외국어도 배울 수 있다는 점은 매우 감사했지만, 어린 마음에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고, 또 적응만 하면 다시 이사를 가야 한다는 점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에서 단 하나밖에 없었던 한국인 친구가 알고 보니 뒤에서 제 욕을 하고 다녔고, 뉴욕에서 아이들이 저보고 노랗다고 놀이터에 못 들어오게 했던 기억도 납니다. 어린 마음에 인종차별이니 그런 생각은 안 했지만, 뉴욕 생활 중 기억에 남는 게 단지 저 기억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합니다. 물론 저에게 선택권이 주어져서 저런 부정적인 경험을 안 하는 대신 한국에서 쭉 살 수 있도록 해 줬다 하더라도 저는 외국에 있는 것을 택했을 것입니다. 지금 저의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성격이 저런 경험에서 온 것 같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학교 때 시애틀에서 살며 비영리 로펌에서 인턴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로펌 고객들을 1차로 인터뷰 하여 사실관계 및 법적 쟁점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었는데, 중학교 때 이후로 한국에만 있다가 갑자기 영어로 그런 일을 하려니 현지인보다 속도도 느리고 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인이라서 일이 느린가 보다, 이런 말을 듣기 싫어서 점심시간에 노트북을 들고 나가 빌딩 계단에서 일을 하다가감시카메라를 본 안전요원이 쫓아온 일도 있었습니다. 법의 정신은 정의와 공평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해 당사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법조항과 판례를 빠뜨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늘일정한 보상을 받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인턴을 마치고 시애틀을 떠날 때 처음 저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변호사가 저에게 선물과 함께 고마웠다고, 자랑스럽다고 칭찬해 준 것이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7. 여가시간에 하는 취미는? 스트레스푸는 본인만의 방법은?

하이킹이나 걷기, 달리기, 수영 등 운동하는 걸 좋아합니다. 한국에서 친구들과 예쁜 커피숍에 가거나 맛있는 밥집을 찾아 다니는 것도 물론 좋아했지만, 보통 친구들과 서울 근교 산으로 등산을 가거나 한강에 가서 하염없이 걷거나 혹은 마라톤에 참석하곤 했어요. 미국에 와서 공부에 치여 살다 보니 운동은 뒷전이 되었지만, 그래도 저녁에 땅거미가 져서 어둑어둑해질 때 도서관에서 나와 캠퍼스를 한 바퀴 산책하고 나면 재충전이 되곤 합니다.

8. 앞으로의꿈은? 그꿈을위해어떻게노력하고있는지?

막연하게는 옳은 일, 혹은 좋은 일을 하고 싶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입법 자문 관련 일을 하고 싶고요. 지향을 갖고 현재 저에게 주어진 일과 도전해 볼 수 있는 일을 하다 보면 꿈에 더욱 다가갈 수 있다고믿습니다. 대학교때 Washington state 의 시민단체에서 상원의원 Steve Conway에게 "sweatfree policy"를 위한 법안을 제안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면서 입법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러한 입법을 통한로비 활동에 함께 참여하면서 저는 정부 단독의 입법보다는 그 법의 영향권에 있는 여러 당사자들의 다양한 입장을 조정하는 법률 전문가의 자문이 입법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법조인은 기본적으로 당연히 법률 지식을 갖추어야 하고, 여기에 더해 사람에 대한 연민과 타인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주어진 법률을 형식적으로 적용하는 '법률 기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저의 감수성과 지향에 법적 지식을 갖추어, 제가 받은 가르침으로 제가 속한 사회에 기여하는 법률가가 되고 싶습니다.

9.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

샌프란시스코 저널이 좋은 매거진이라는 평가를 많이 들었는데, 이번 8월호에 참여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샌프란시스코 저널이 더욱 더 발전하기를 바라며, 매거진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의 가정에 좋은 일들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