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만,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한결같이 겸손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주변을 돕는 훌륭한 지도자 한국의 권익을 지키며, 문화와 위상을 드높이는 참 외교관
한 동 만,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6월 17일(수) 샌프란시스코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서 한동만 총영사를 만났다. 그는 약 2년정도 샌프란시스코의 총영사로 근무하면서 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분수가 쏟아지듯 참신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쉴새없이 고안해내고,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기며 동포사회에 신뢰와 존경을 받고있다. 또한, 그는 겸손하고 따뜻한 품성으로 노약자들을 섬기며, 많은 동포 행사에서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밥을 퍼주며 권위를 버리고 신실한 사랑으로 동포사회에 깊이 뿌리 내린 훌륭한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안보와 경제 전문가로, 실리콘벨리의 창조 경제에 대해 전문적인 정보와 지식을 필요한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수많은 기고문 과 저서를 집필하며 특강을 병행하고 있다. 쉴새없이 꽉차인 행사들과 국가의 공식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놀랄정도로 많은 일들을 확실히 매듭짓는 부지런함과 열정에 감동받았다.
만난사람 발행인 아이린 서
한동만 주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는 경기도 평택에서 차로 40분 정도 더 들어가는 안중리 시골 작은 초가집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그곳에서 마쳤다. 그에겐 누나 4명과 형1명이 있고 가정의 막내로 사랑을 많이 받아왔다. 지역의 교회를 다니면서 남을 배려하는마음과 어머니로부터 리더쉽을 익혔다.
아버님은 외무고시 합격 2개월전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90세인데 건강히 잘 계신다. 아버님이 안계시니 거의 매일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린다. 주로 식사 하셨어요? 건강 하세요? 등 두 세마디가 거의 전부인 경우가 많다. 해외에 거주할때는 통화요금이 비싸서 일주일에 한번정도 밖에 전화를 못드렸던적도 많았지만, 이제 전화 요금이 저렴해져서 매일 규칙적으로 전화드린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노인분들 뵐때마다 잘 섬겨야겠다는 생각을 갖는다고 한다.
한 총영사가 졸업한 안중 고등학교는 실업계 고등학교인데, 실업계 1반, 인문계 1반, 자연계 2반으로 이루어진 작은 규모의 학교였다. 친구 하나가 외교관은 해외에 갈 수 있다고 말하며 외교관이 되는 꿈을 키우며 전세계의 나라와 수도의 이름들을 '필리핀-마닐라' 식으로 외우곤 했었기에 외교관에 대한 막연한 호감을 갖게 되었다.
고향인 시골에서는 학생들이 어릴때 희망으로 판검사, 국회의원이 되고싶어했다. 어느정도 부유한 친구들은 서울로 많이 유학을 떠났다. 한 총영사는 가정이 넉넉치 않아, 지역 고등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는데, 친구중 하나가 사법고시 합격후 검사로 재직중인데, 그 친구와 고교시절 서로 격려하며 함께 공부하며 서로 도전을 줄 수 있었던것이 아주 좋은 기회였다고 회상한다. 고교시절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었기에 언론인이 되어 세상을 바로 잡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연세대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때부터 신문배달을 했었는데, 당시 신문 석간의 가격이 400원이었는데, 다 배달하고 나면 600원을 받았고, 배달후 한부 정도가 남아서 정가보다 좀 저렴하게 300원에 팔면 하루 900원 정도의 수입이 있었다. 학창시절 계속해서 아르바이트로 막노동, 신문배달등 가능한 많은 일들을 했다. 또한 대학 장학금을 꼭 받아야할 형편이어서 학과공부도 열심히 해야 했는데, 고등학교시절 학교 장학금 이외에 '로타리 장학금'도 받은것을 계기로 지역 봉사단체가 좋은 일을 많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지역 봉사에 대한 개념을 직접 체험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많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실제 취업전선에서 일하면서 세상을 접하다보니, 언론인되어도 세상을 바꾸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게되어, 대학 2학년부터 외무고시에 관심을 갖고 응시하게 되었다. 대학시절 낭만적인 기억은 전혀 없었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에만 매진했었다.
1981년 15기 외무고시 시절에 한해에 50명 정도 외무고시에 최종합격이 되었는데, 1차는 5배수를 뽑기때문에 1차 250명 안에 바로 합격할 수 있었고, 쉽게 외무고시에 최종 합격할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16기부터 외무고시 합격자 숫자가 20명으로 대폭 줄어들면서, 몇번 낙방후 19기에 약 100 대 1의 경쟁을 뚫고 드디어 2차 외무고시 20명안에 들어 최종합격을 했다.
1985년 외무고시 최종 합격후 외무부에서 2년간 근무하는중, 아내를 만나 첫눈에 반해 3개월만에 결혼을 했다. 외무고시 합격자에게 해외 연수를 보내주는 혜택을 받게되어, 1989년 프랑스의 판테옹 솔본느 (Pantheon-Sorbonne) 대학 국제 기구법 석사과정을 마칠수 있었다. 1990년 주 알제리 2등 서기관, 92년 주 영국 2등 서기관, 98년 주 호주 1등 서기관, 2000년 대통령 비서실근무, 2002년 안보정책과장, 2002년 주 뉴욕 영사, 2006년 통상 홍보기회관실 통상 기획관, 2007년 주 미국공사 참사관, 2010 년 국제 경제국 심의관, 2011 국제 경제 국장을 거쳐 2013년 6월 주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로 부임했다. 2012년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으로 직무에 정려하여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대한민국 홍조 근정 훈장을 수상했다.
큰아들은 1988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10년만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외무고시 합격후 외교부에 근무하기 시작하고보니, 다른 고시 합격자들은 유명 경기, 경복, 서울고등학교 출신들이 대부분으로 서로 인맥도 잘 맺는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겠다고 다짐했고, 그때부터 줄곧 남들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하고 1시간 늦게 퇴근하며 열정적으로 일에 임했다.
1. 경제 부흥, 2. 국민 행복, 3, 문화 융성, 4.평화통일 기반 구축에 최대한 촛점을 맞춰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무디스의 신용평가에서 한국의 평가가 낮게 나오는것에 자극을 받아 경제부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워싱턴DC 에서 월 스트리트 포럼을 만들게 되었고 국제 경제 국장이 되었다.
실리콘벨리가 경제에 주요 지역인 만큼, 코트라에서 벤처 캐피탈리스트들과 만나고, 창조 경제 포럼, 창조 경제 간담회, 중소기업 후원하고, 소개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해 오고 있다. 실리콘벨리의 상황을 관심있어하는 많은 분들과 나누고자, 여러 언론에 기고등을 많이 해왔는데, 더욱 많은 분들이 방문하시고 연락이 많이 오고 해서 조금 더 정리를 해 '창조 경제의 꽃을 피우다'라는 저서를 집필하게 되었다. 외의 저서로는 《다자안보정책의 이론과 실제》, 《영어연설의 이론과 실제》, 《한국의 10년 후를 말하다》. 《한국의 10 년 후를 말하다》 저서는 꽤 많이 판매되고 있는데 모든 인세가 한국의 장애인 마을로 기부되고 있다.
그는 동포 권위신장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샌프란시스코 영사관의 주차 공간 부족과, 먼 거리의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순회 영사 서비스를 시작하게되었다. 동포를 찾아가는 영사관으로 거듭나게 되었지만, 순회 영사 서비스 순서를 한시간 이상 기다리는 분들께 도움을 드리고자 "전문가와 함께하는 순회영사 서비스"를 시작했다. 법률, 회계, 의료, 한방 서비스등을 순회 영사서비스 시간에 병행하고 있다. 이 서비스의 호평으로 2014년 샌프란시스코 영사관이 행정개선 우수사례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해 다른 지역의 영사관에 좋은 사례로 소개되며 같은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도록 독려하는 단계에 있다. 또한, 친절도 서비스에서 전세계에서 세계 2위를 했고, 미국에서 1위를 했다.
그는 항상 새롭고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고안해내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하며 동포들을 최선을 다해 돌보는점이 크게 인정받아 재외 동포 신문이 주최하는 '발로 뛰는 영사상' 총영사 부문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인 유학생이 약 9만명이 미국에 유학중이며, 이중 3만여명이 미국에서 과학 기술분야를 공부하고 있는데 졸업후 비자 받기가 어려워 수학후 한국으로 돌아가는 실정이다. 이에 한국인 전문직 비자를 매년 한국인이 특별히 15000명 이상 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표적 친한 유명 정치인인 마이크 혼다 연방 하원의원이 적극 도와주며 지지 해주고있다. 이 한국인 전문직 비자 혜택안에 작년에 112명의 정치인들 스폰서를 받았는데, 올해는 약 50여명을 받은 실정이다. 연방하원의원 만나게 될 경우 적극적으로 스폰서 사인을 받고 있다. 주류 정치의원들과의 교류와 협력을 하며 스폰서를 받고자 다양한 네트워크를 이뤄가고 있다. 한국정부에서 참전용사 메달 2000개를 받아 참전용사, 그리고 이미 유명을 달리한 참전용사의 미망인들 과 자녀에게도 메달을 수여하며 지역의 영향력있는 하원의원등과 함께 지역 정치인들과 유지들이 친한국 인사가 될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고 있다.
한국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한복 패션쇼, 전통 무용, 한국 전통 음식등을 나누는 다양한 문화행사에 총영사관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지원하고 있다. 또한, 총영사관 관저에 주류사회 지역 유지들뿐 아니라, 정치인들, 언론인들을 초청하여 민간외교활동을 끊임없이 이어나가는 한편, 한 총영사가 자발적으로 지원하며 다양한 후원을 받도록 연결을 해주며 진행되고 있는 6.25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탑은 내년초 4월경쯤 완공될 예정이다.
민간 외교관의 개념을 뿌리내리기 위해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Connect to Korea' 를 2014년 발족해 200여명이상 모여 서로 만나 교류를 하며, 참여한 사람들을 한국 문화 명예 홍보대사로 부르며, 그들의 배우자나 관련인들 모두 교류하며 더욱 한국에 우호적인 친한 인사로서 네트워크를 결속해 나가는 취지로 만들어져, 각 지역별로 동일하게 Connect to Korea 를 유타, 덴버등에 계속 발족하며 서로 연계하며, 좋은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한 총영사는 2015년 한해에만 대략 대학, 기관, 고등학교, 연구소등에서 총 28회의 특강을 하며 공공외교의 기수로 활약하고 있다. 또한 지속적으로 연구하며 아는 지식을 다른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끊임없이 기고문과 컬럼등을 지속하고 있다. "미 국토 안보부 장관과 국방장관이 실리콘밸리를 찾은 이유", "K-Tech, creative economy in Silicon Valley", "실리콘밸리를 벤치마킹하라", "녹색 경제를 창조경제 정책으로 육성해야", "실리콘밸리 한국 창조경제 바람"등이 있다.
그가 최근 읽은 책은 '보이지 않는 차이'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30%의 의지와 노력을 이용해 행운을 불러들인 것이며, 그들은 부지런하고, 겸손하며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시련을 잘 극복하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공통점이 있다는 내용었다. 또 '꾸뻬씨의 행복여행'에서는 진정한 행복은 미래에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고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것이고, 행복의 비밀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것이며, 행복은 때때로 뜻밖에에 찾아온다고 강조한다.
여유시간이 있을땐 독서를 즐기며,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수채화폭에 담기도한다. 풋볼을 굉장히 좋아하는 작은 아들과 풋볼 경기도 함께보고, 아들과 지역 청소행사등에 자원봉사로 참석하며 아들이 주변사람들을 배려하는 자세를 익힐수 있기를 바라며 노력하고 있다.
한동만 샌프란시스코 총영사와 대화를 나누며 그의 겉모습은 신실하고 겸손하며 부드러운 품성으로 마냥 좋은 사람으로 비쳐지지만, 한국의 권익과 문화와 위상을 높이는 일에는 냉철한 카리스마와 추진력이 있으며, 동포들을 섬김에 뜨거운 열정이 가득함을 깨달았다.
그와 같은 훌륭한 외교관이 많아진다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더욱 밝아질것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