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러브 SF 저널' 대표 아이린 서
아이 러브 SF 저널' 창간 1주년을 맞았다. 독자들의 애정어린 조언과 관심이 매월 급격히 많아지면서, 아이린 서 대표가 어떤 인물인지, '아이 러브 SF 저널' 매거진을 발행하게 된 동기와 각종 에피소드등 독자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었다. 그녀의 경력사항을 마주대하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렇게 다양한 일들을 해낼 열정은 디서 왔을까?' 였다. 그녀에게 직접 대답을 들어 보았다.
만난사람 써니 박 기자
Q. '아이 러브 SF 저널' 을 창간하게 되었는데 어떤 계기로 매거진 창간에 나섰는지 들려 준다면?
A. 북가주 지역에 한인들 수가 급격히 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품격 한국어 매거진이 없었다. 나는 중앙일보와 크리스챤 라이프지에 5 년이상 매주 게재했던 칼럼을 모아서 'L.O.V.E. 경영', 과 '행복전도사 아이린' 등 책을 두 권 낸 경험이 있고, 북경에서 개최된 세계 북페어 초청 되어 중국어판으로도 출간 되었다. 많이 부족한 책이지만 미국 전역과, 한국, 또 중국에서 몇몇 분들께서 책을 읽고 새로운 길을 도전하고 있다거나, 어려운 상황이지만 힘을 낼수 있게 되었다고 고맙다는 연락이 종종온다. 책을 출판해보니 글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어로된 읽을거리가 풍족하지 않은 미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읽고 즐길 수 있는 좋은 매거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전국적으로 발행되고 있는 아이 러브 코리아타운과 파트너쉽을 맺고, 북가주에서 '아이 러브 SF저널' 매거진을 창간하게되었으며, 더욱 많은 한인들께 다가가기 위해 온라인으로도 매거진을 쉽게 접할수 있도록 웹사이트(go20.com)도 제공하고, 전자 매거진을 구독자들에게 이메일로도 발송하고 있다.
Q. 한국에서도 훌륭한 커리어를 쌓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미국으 로 오게 된 이유가 있는지?
A. 1999년에 북가주 레드우드시의 오라클사에 입사하면서 도미했다. 어릴때 부터 미국에서 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외국 출장이 잦으셨던 아버지께서 미국사람들은 참 밝고 유머도 많다고 하셨던 말씀이 인상깊었던것 같다.
이화여대 입학 직후 시애틀에 사는 작은아버지께 미국으로 초청해달라고 연락을 드렸다. 얼마후 한국에 초청장이 도착했는데, 어머니께서 보시더니, 나를 호되게 혼내시며 '네 힘으로 갈수 있게 힘을 스스로 키워야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폐를 끼치는것은 절대 안된다'며 초청장을 눈앞에서 찢어 버리셨다. 부모님께서는 평생 단 한번도 내게 큰 소리로 꾸중을 하신적이 없었다. 언제나 칭찬과 격려를 해주시던 분들이셨는데 단호했다. 대학 졸업후, PWC회사에 시스템 컨설턴트로 입사해 근무하며 고려대학교와 카이스트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한국에서 커리어를 쌓으면서도 미국생활을 꿈꿨고 미국의 오라클 몇몇 부서에 입사지원을 했다. 수많은 전화 인터뷰후 결국 2년 만에 원하던 오라클 본사에 입사를 하게됬고, 9년간 오라클에서 시니어 매니저로 근무 했다.
Q. 교회에서 청소년들과의 사역활동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A. 어렸을 때부터 모태신앙이었다. 어머니는 5대째 아버지는 3대째 교인 이기 때문에 나도 자연스럽게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도미후 교회에서 청소년 전도사로 학생들과 7년을 보냈다. 아낌없이 그들을 사랑했기에 언제나 소중한 기억이다. 함께 멕시코 선교도, 샌디에고도, 아메리칸 인디언 마을에도, 기도원에도, 영화관에도, 식당에도, 우리집에서 슬립오버도 수도 없이 하며 너무나 즐거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것은 학생들과 멕시코 단기선교를 다녀온 경험이다. 학생들이 출발할때는 불만투성이였다. 목마르다, 피자 먹고 싶다, 너무 덥다 등의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막상 가서 봉사활동을 시작하니 불평이 하나도 없었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집도 없이 흙바닥에서 잠을 자고 물은 일주일에 한 번씩만 커다란 드럼통에 담아주면 그것으로 모든 마을 주민이 아껴서 먹고 생활하는 그런 마을이었다. 나를 포함해 모든 학생들이 입고 있던 옷과 신발을 모두 주고 돌아왔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나와 아이들은 참 많은 것을 배웠고 그 때부터 다양한 곳에 봉사활동을 다니고 있다. 당시에 어렴풋이 나마 삶에 있어서는 얻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큰 기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Q. 저서들도 출판하고, 뉴스 앵커직, 법무사, 부동산관련 사업도 하는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게 된 이유는?
A. 신문에 칼럼을 쓰게되었고, 꾸준히 써서 책도 2권내게 됬고 중국 베이징에 세계 북 박람회에 초청을 받아 중국어로도 출간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북가주 한인 텔레비젼에 한 인터뷰프로그램 진행자가 없어 잠시 돕게 되었는데, 그후 8여년간 텔레비젼 뉴스 앵커를 했었다. 그것 또한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또, 교회에서 사역을 하다보니, 언어적인 장벽으로 영문서류등의 내용을 알려달라는 한인분들이 많았다. 간혹 조금씩 돕다보니 이왕 도와드리려면 좀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던차에, 법무사과정을 밟게되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의 법무 서류업무를 돕고있다. 도미후 팔로알토에 집을 한채 구매했는데, 한국과 달리 서류가 굉장히 복잡했다. 한국에서 직장에 다니면서, 주말에 '당신도 이틀이면 경매박사'라는 책을 우연히 읽고는 바로 다음주말에 경매에 나온 집을 한채 산 적이 있어 부동산에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국의 부동산에도 관심이 가게 되었고 브로커 라이센스를 받고 부동산 비지니스도 즐겁게 하고 있다.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고 한가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정신을 못차리고 매달리는 성격이다. 뭔가 배우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밤샘 작업하는 것을 무척 즐긴다. 여러가지를 알아 가는것이 즐겁다.
Q. 셀 수 없이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신데 이런 에너지와 열정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궁금하다.
A. 중학교 다닐때 한번은 외할머니와 성탄절에 교회를 함께 갔는데, 한 여학생이 코피를 갑자기 흘렸다. 부모님들이 딸의 코피를 곧 멈출수 있었지만, 이미 교회 의자와 바닥엔 핏물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예배가 끝난뒤 외 할머니는 교회의자 커버를 둘둘 말아싸시고, 바닥도 깨끗이 닦으셨다. 어린 나이에 나는 화가났다. '왜 할머니가 그런걸해요? 그 아이 부모가 해야지!'하면서 할머니 하시지 말라고 말렸다. 외할머니는 나를 가만히 보시고 웃으시면서 '인원아, 누구든지 먼저 본사람이 깨끗이 치우는거야. 난 이게 재미있고 좋다'라고 하신 기억이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 외할머니는 무척이나 부지런하고 잠시도 쉬지 않으시던 분이셨다. 아버지또한 항상 바쁘시고 언제나 긍정적이며, 지속적으로 배우는것을 좋아하시고, 적극적으로 사신다. 아마도 외할머니와, 아버지의 성품을 받은것 같다. 마음에 우러나는 일들은 다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Q.앞으로의 목표가 있는지?
A. 예전에는 뭔가 이루고 가시적인 결과물이 있어야만 만족했다. 하지만 요즈음은 하루 하루가 그저 감사하고 내가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것 자체만으로도 만족을 느낀다. 전과는 다르게 스스로에게 조금 더 관대해진 것 같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까를 생각하게 된다. 앞으로도 조금이나마 주변을 도우며 살고싶다.
Q. 독자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A. 독자분들과의 만남이 오래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리고 지면을 통해서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관계에서 벗어나 매거진이 독자와 소통하는 장이 되었으면 한다.
여러분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다양하게 전달해 주고 싶다. 오랜 친구와 같은 매거진이 되려고 하니 애정의 눈으로 지켜봐 주시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