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건강 및 식품 과학계 최고 과학자 노봉수 박사

문교부 장관상, 농림부 장관상, 젊은 과학자상 수상, 국내외 20개 주요 특허 보유, 20여편의 건강 및 음식 관련 저서, 150여편의 주요 학술 논문 발표, KBS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과학카페, 아침마당 등 다수 방송 초청 출연

한국 식품 과학계의 거장, 노봉수 박사가 그의 청춘을 지낸 마음의 고향 북가주를 방문하게되어 마운틴뷰에서 그를 만났다. 현대사회에선 사람들이 만나게 되면 가장 많이 거론하는 주제가 "건강'인 만큼, 수 많은 사람들이 더욱 더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고 있기에, 건강 및 식품 과학계에 두각을 나타내고있는 노박사가 각종 방송에 자주 초청되어 식품 및 건강정보를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면서 많은 인기를 끌고 있어, TV 광고등에 출연하기도 한다. 그는 현재 서울 여자 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이다. 너무나 따뜻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닌 노봉수 박사를 만나는 순간, 과연 그는 무슨 사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의 삶이 사뭇궁금해졌다. 그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얻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꼭 알고 싶어졌다.

노박사는 한국내 식품 과학계에 "전자코' 기술을 한층 발전시켰다. 농산물, 한약재, 각종 버섯, 기름, 와인, 치즈, 쇠고기 등 전반적인 제품의 향기를 감지하여 안전성분석 및 수입품과 국내제품의 세밀한 판별이 가능하도록 데이터 분석체제를 정립함으로써 공로를 크게 인정받고 있다. 그 외에도 그의 전문분야에 끊임없이 다양한 업적을 이루어 가고 있다.

보수적인 아버지와 전통적인 따뜻한 어머니 사이에서 2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난 노박사는 어릴 때 별명이 "노랭이'였다. 보성중학교 시절 학교에 다닐때, 종로 4가에서 혜화동을 통학했는데, 하루에 2원 50전의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걸어다니며, 3년 내내 모은총 금액이 3천원이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그의 성장기에 가장 많이 돌보아주신 큰 고모님께 고사리손으로 모은 3천원을 모두 사용해 고운 치마를 한벌 해드렸다. 그는 평생 머리를 집에서 다듬는 등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 할 때, 감사하게도 한 미용사분의 초청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은 적이 단 한번 있었을 뿐-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가급적 아끼는 알뜰한 성격이다.

그는 서울대 공대 졸업 후, 동서 식품 연구소에 근무하던 중 아내를 만났다. 서로의 진로에 방해된다는 궁합을 이유로 가정의 큰 반대에 부딪혔으나, 두 사람이 변함 없는 마음으로 성실히 부모님을 설득하여, 1년여 만에 결국 양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결혼을 했다.
노박사는 한국직장에서 3년여간 모은 자금 1만달러를 가지고 아내와 함께 큰 포부를 안고 도미해 UC 데이비스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갓 태어난 딸과 함께 3명이, 정말 알뜰히 살았지만 1년여 만에 가진돈이 거의 소진되어 아내가 유태인 변호사 가정의 아이 둘을 돌보게 되었다. 그 유태인 부부는 향후 한국과 미국의 무역거래가 급격히 늘것이고, 이로 인해 국가간 법적 분쟁이 많이 발생할것으로 생각한다며, 자신의 어린 아이들에게 매일 한국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고, 아이가 한국어 한 단어를 익힐때 마다 10센트씩 추가로 지불했다. 현재 삼성, LG, 현대 등 많은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진출하는등 미국과 한국이 여러 사업에 걸쳐 복잡한 무역거래가 활발히 이뤄지게 되었고, 또한 여러 법적 분쟁들이 일어나는 상황을 볼때, 30여 년전, 당시에는 한국의 위상이 많이 낮았음에도 그 유태인 변호사 부부의 정확한 선견지명이 무척 놀랍다. 우리도 현재만을 보지 말고 앞으로의 변화에 대비하는 태도를 갖고, 항상 부지런히 생각하며 장기적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할것이다.

노박사 부부는 조그만 텃밭을 가꾸어 토마토, 쑥갓, 상추, 깻잎 등을 직접 키워 자급했으며, 데이비스 시에서 살면서, 새크라멘토에 있던 한인 마켓에 가서 쌀과 식료품등을 구매해 데이비스에서 팔면서1년간 약 300달러 정도를 모을 수 있었고 세탁기나, 전축 등 가정에 필요한 물품을 하나하나 장만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사소한 물건이지만 볼때마다 긴세월의 땀이 만들어낸 결실이었기에 노박사 부부는 큰 행복감을 느꼈다. 그는 석, 박사 과정을 마치는 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유학생활이 오히려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 시기에 "스스로 탑을 하나씩 쌓아 올려야한다. 도움을 거저 받지 말자" 라는 확고한 삶의 태도를 정립하게되었고, 제자들의 주례사를 할때면, "어떤 것이든 쉽게 받지말고, 하나하나 부부가 함께 노력하며 마련해 나가는 경험을 꼭 하라"고 강조한다고 한다.

그에게 삶을 사는 방식을 깨우쳐준 멘토가 있었는지 묻자, 서슴치 않고 데이비스 거주 당시 새크라멘토 한인 교포들이 그의 인생 멘토라고 전한다. 그들은 삶을 보는 시각을 깨우쳐 주었을 뿐 아니라 아이 출산시에 차가 없어 발을 구를때 도와주는 등, 생활에 꼭 필요한 도움을 베풀었고, 평생 잊지 못할 은인이라고 말한다. 노박사가 한국에 교수로 부임하게 되어 떠난다는 소식에 넉넉치도 않으신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한푼 두푼 당신들의 연금을 모아 가죽가방과 구두를 장만해 주시며 멋진 교수가 되라고 격려해주심에 다시 한 번 감동을 받고,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자, 그분들은 당신들께 고마워 하지말고, 나중에 혹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그 사람을 도와주는것이 바로 은혜갚는 것이라고 강조하셨다고 한다.

노박사는 은혜갚는 법을 잊지 않았고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 조혈모 세포 기증자 협회에 가입했고 회장이 되어적극적으로 그들을 도왔다. 조혈모 세포 기증은 흔히 말하는 골수기증이라고 보편적으로 생각하면 된다. 노박사는 골수를 기증하기에는 고령인 49세에 골수이식이 긴급히 필요한 한 초등학생과 적합판정을 받게되었고 기쁜 마음으로 이식수술을 감행해 어린 학생에게 새 생명을 주었다. 10여년 이상 지속적으로 새 생명을 위한 이캠페인을 계속하고 있다. 중학교 시절 큰고모님께 어린마음에 참으로 기특하게 정성을 다해 은혜를 갚았고 새크라멘토 교포분들의 은혜를 잊지 않고 현재 처한 상황에서 성실히 갚아 나가는 고운성품이 세월이 흐르며 그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남겨주었음을 깨달았다. 메말라가는 세상에 순수한 마음으로 은혜를 잊지않고 성실히 살아가는 노박사와 그의 가정에 무궁한 복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