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조선시대를 걷다

많은 사람들이 모국관광을 할 때 몰라보게 달라진 한국의 발전상에 감동을 느끼곤 한다. 한국을 떠나올 때만 해도 낙후되어 있던 골목 골목이 이제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거대한 메트로폴리스가 되어서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을 맞이 한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한국을 간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국 생활에 익숙한 2세들이 쭉쭉 뻗은 고층빌딩에 감동을 느끼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한국문화의 독특한 향취에 감탄을 한다. 한국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생소하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다사다난했던 한국의 역사는 흥미진진한 주제가 될 수 있다. 어디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정취와 함께 하는 스토리 텔링은 누구에게나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스토리와 함께 하는 역사적인 문화재들은 2세들에게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심어주고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는데 최고의 교재가 될 것이다.

경복궁 - 을미사변의 비극

1895년 조선을 둘러싼 정세는 그야말로 '미니 세계대전'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에 들어와 있는 나라들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거나 하려고 시도한 국가는 일본,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중국(당시 청나라), 영국 등이었다. 일본이 그 중에 주도권을 쥐고 있긴 했지만 일본이 원하는 대로 조선을 좌지우지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한국의 정치인들과 왕실내부에서도 외세를 등에 업은 파벌이 생기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명성왕후를 중심으로 한 친러파와 내무대신이었던 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친일파였다. 그들의 대립은 극한까지이르렀는데 박영효가 왕비시해음모혐의로 정계에서 축출되고 어윤중 등을 중심으로 한 친러파 내각이 꾸려지자 일본은 이에 위기를 느끼게 된다.

10월 8일 새벽 5시경 일본의 자객들은 광화문을 지나서 경복궁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흥선 대원군을 가마에 태워 궁궐 문을 열게 한 자객들은 궁궐 뒤편의 왕비 침실인 건청궁 안 옥호루까지 순식간에 진입했다. 명성왕후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태웠다. 그 후 뒷산에 묻어 증거를 인멸하려 했지만 당시의 참혹한 현장을 고종과 황태자, 미국인 교관 다이 등 많은 사람이 보았다. 끔찍한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을미사변은 경복궁에서 있었던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이다. 이후로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과 항일의병활동 등의 역사적 사건 등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고 한반도를 무대로 한 외세의 싸움은 더욱 더 치열하게 된다. 조선 600년의 역사 중 가장 먼저 지어졌던 궁궐인경복궁은 궁궐로서 마지막을 비극으로 장식하게 된다.

현재 경복궁은 왕이 집무를 보던 근정전, 왕이 연회를 즐기던 경회루등 문화재들이 잘 보존이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을 가로 막았지만 현재는 이 건물들이 모두 철거되었다. 그 후 서울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경복궁은 시민과 함께하는 장소가 되었다. 개화기의 한양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추억의 거리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재미를 제공하고 있다.

역사 Memo
경복궁은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졌지만 조선왕조의 위엄을 다시 세우고자 했던 홍선대원군에 의해서 다시 중건되었다. 같은 해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고종은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경복궁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경희궁 - 수난의 고궁

경희궁은 서울에 있는 5대 고궁 중에서 가장 수난을 많이 당한 곳이다. 궁이 창건 된 것은 1617년. 광해군이 창덕궁을 꺼려서 길지에 새로운 궁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는 인왕산 아래 인경궁을 창건하였으나 다시 자신의 이복동생인 정원군의 옛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경덕궁을 지었다. 이것이 지금의 경희궁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다 지어놓은 궁에 들어가보지도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왕위는 집터를 뺏긴 정원군의 장남에게 돌아갔고 그는 인조가 되었다. 그 후 정조 등 여러 왕들이 정사를 보는 궁으로 사용하였다. 1829년 순조 29년에 큰 불이 나 절반이 넘는 건물이 타 버렸다. 이듬 해 바로 소실된 건물을 재건하는 등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자 일제는 궁궐을 해체하는 작업을 진행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건물들이 옮겨지거나 철거된 곳이 경희궁이었다. 1910년부터 철거되기 시작한 경희궁의 전각과 대문은 1925년에 모두 철거되었다. 홍화문은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 사당을 장충단 공원 맞은편에 지으면서 정문으로 사용했고 그 후는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숭정전은 현재 동국대학교 구내 자리로 옮겨졌다.

일제에서 독립하고 난 후에는 경희궁 터가 서울고등학교로 사용되었다. 1974년이 되어서야 전각들이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80년에 경희궁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신라호텔의 대문으로 쓰이던 흥화문은 1988년에 경희궁으로 돌아왔지만 제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흥화문이 있던 자리에 이미 구세군회관이 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풍파를 겪은 경희궁은 현재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도심속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호젓한 궁궐 뜰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면 보이는 서울의 고층건물들은 옛 것과 새 것이 어우러지는 서울이란 도시의 매력을 아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 또한 볼거리가 풍부한 관광지로 많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수도 서울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고 아이들에게는 생소한 옛날 물품들 또한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야경을 소규모로 축소하여 전시해놓은 미니어처나 옛날에 사용되던 전차를 보여주는 야외전시도 인기만점이다.

역사 Memo
경희궁은 2009년 명품 브랜드인 프라다와 손을 잡고 현대예술전시를 위한 임시전시관을 설치했었다. 철골구조물로 지어진 프라다 트랜스포머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참신한 시도였다는 의견과 민족 고유의 문화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창경궁 - 사도세자를 둘러싼 이야기들

영조의 아들이었던 사도세자는 우리에게 당파싸움에 휘말려서 뒤주에 갇혀 죽은 불행한 세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가 죽은 이유는 영조에 대한 반역의 혐의. 지금까지의 역사적 평가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노론과 소론의 당쟁에 휘말려서 영조의 미움을 받았으며 친아들을 죽인 영조는 비정한 아버지로 보인다.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가 죽는 것을 허가한 비정한 어머니라는 이미지가 박혀 있다. 사도세자가 태어나고 죽은 곳이 바로 이 창경궁의 선인문 안뜰이다.

하지만 최근 역사적 연구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광증이 심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미쳐있는 상태였고 잇따라 궁궐 내에서 살인을 저지른다. 그가 죽인 사람의 수는 오늘날 어지간한 연쇄살인범이 죽인 숫자보다 많다. 기록에 따르면 중관, 내인, 노속 등 거의 100명에 이르는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방법 또한 잔인했는데 직접 자신의 손으로 때려서 죽였다고 한다.

사도세자가 죽음을 맞이하는 그날 밤 영조는 궁궐 뜰에 엎드린 세자에게 소리친다.

"내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지 않았느냐?"

세자는 영조의 자식을 낳은 후궁을 때려서 살해했다. 심지어는 친여동생 화완옹주에게도 칼을 들이댔고 어머니인 영빈 이씨까지 죽음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이런 사도세자의 흉악한 행각은 왜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에 등극하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살인마로 기록되어 있는 역사를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었고 사도세자의 살인행각에 관한 기록을 없애거나 태워버리려고 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은 그런 식으로 없어졌다.

이런 비극적인 일이 있던 창경궁은 본래 성종이 대왕대비인 정희왕후와 소혜왕후, 안순왕후 등을 모시기 위해서 별궁을 지은 것이다. 유난히 화재로 인한 손실이 많았는데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없어졌고 광해군때 다시 재건했지만 인조반정과 이궐의 난 때 전각의 많은 부분이 불타 없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씻기 힘든 치욕을 겪게 되는데 창경궁의 명칭이 창경원으로 바뀐 뒤에 동물원과 식물원이 자리잡은 것이다. 왕이 거처하던 곳에 동물이 사는 일은 해방 후에도 한 동안 계속 되었다. 1981년에 들어서 겨우 복원 계획이 세워졌고 원형을 되찾기 시작했다.

역사 Memo
우리에게 친숙한 장희빈이 궁내의 취선당에 주로 거처했다. 숙종의 총애를 받던 장희빈이 숙종의 계비 민씨를 독살하는 등 많은 악행을 저지르자 희빈과 그의 일가를 숙청하였다.

창덕궁 - 왕자의 난 그리고 이방원

조선을 건국한 것은 이성계다. 조선의 기틀을 잡은 것은 정도전이다.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안정기에 접어들 게 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이방원 즉 태종이다. 1392년 새로운 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를 한다. 이 때 지어진 것이 경복궁이다. 이방원은 당시 여덟 명에 달했던 왕자 중에서 누구보다도 돋보이는 존재였다.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의 충신들을 제거하는 등 건국에 여러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1938년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데 그는 사병을 이끌고 자신의 형제인 방석과 방번, 정도전을 무참히 살해한다. 이방원은 형인 방과를 2대 왕 정종으로 세우는데 그는 수도를 옛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으로 옮겼다. 형제들이 서로 죽이던 한양을 싫어했기 때문.

정종이 2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자 이방원이 3대 태종으로 즉위했고 한양으로 다시 돌아가지만 형제의 난이 일어났던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아 경복궁 동쪽에 궁궐을 세우도록 지시한다. 이것이 바로 창덕궁이다.

창덕궁을 상징하는 건물은 정무를 보던 인정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태종 때 처음 지어진 뒤 임진왜란과 화재로 세 번이나 소실되었다. 오늘날의 인정전은 1804년에 재건된 네번째 인정전이다. 창덕궁은 비대칭적인 구조로도 유명한데 자연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자연과 함께하는 궁궐을 목표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숲을 해치지 않고 숲에 맞춰서 짓다 보니 비대칭적인 구조가 나오게 되었다. 창덕궁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탄하는 후원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비원이라 불렸다. 울창한 숲의 한 가운데에 있는 연못과 정자는 호젓한 분위기를 내고 있어서 한국고유의 멋과 향취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소라고도 불린다.

역사 Memo
개화기의 왕이었던 순종과 고종은 주로 창덕궁에서 기거했는데 그래서 신문물이 왕실에 받아들여지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 1894년에는 한국 최초의 발전기가 설치되었고 1910년에는 당구대가 설치되어 한국 당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경운궁(덕수궁) - 고종 혹은 대한제국 황제가 있던 곳

덕수궁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불타버린 경복궁을 대신해 왕족의 사가였던 이곳을 행궁으로 삼으면서 궁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선조가 이곳에서 머물다 승하하였으며 광 해군이 즉위한 곳이기도 하다. 그 때부터 경운궁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인조반정이 일어나 인조가 즉위한 곳이기도 하다. 그 후 200년 동안 비어 있다가 고종 떄부터 궁궐의 역할을 다시 하게 되는데 이유는 위에 이야기된 경복궁에서 일어난 을미사변 떄문이다.

고종은 을미사변 후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하게 되는데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한다. 그 후 환궁을 하게 되는데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무언가 문제가 있을 때 피해있을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하루 하루 불안한 날을 보내던 고종은 국호를 대한으로 고치고 황제국임을 선포하지만 일본의 압박은 심해져만 갔다. 일본은 당시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에서 차례로 승리하며 조선을 지배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일본은 고종을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는 이유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왕으로 등극시킨다. 그리고 경운에서 덕수로 궁의 이름도 바꾸었다. 파란만장한 조선왕조 600년의 시대는 순종에서 끝나게 되고 경운궁의 비운의 궁궐로 남게 되었다.

경운궁에 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석조전. 한국에 궁궐에 걸맞지 않은 서양식 석조건물이다. 영국인 G.R.하딩이 설계한 이 건물은 대한제국 선포직후 제국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서 건축되었다. 1900년에 착공하여 10년만인 1910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준공된 뒤에는 이미 대한제국의 말기로 황제국의 궁궐로서 사용되지 못했다.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쓰이는 등 해방이후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던 석조전은 2012년에 내부 복원이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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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직후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리게 된다. 이 때가 1946년 1월 16일. 예비회담 이후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되고 3월과 5월에 1, 2차 회담이 역시 석조전에서 열렸다. 회의에서는 미국과 소련의 의견대립이 전혀 조정되지 못했고 한국 내의 좌우대립 또한 극심해졌다. 결국에 1948년 5월 남한 단독의 총선거가 실시되고 한국은 분단국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