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역사

8월의 역사

1981년 8월 1일 MTV 개국하다

처음으로 MTV가 방영될 때를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곤 한다. MTV는 음악계와 텔레비전 업계를 완전하게 바꾸어 놨기 때문에 시작 또한 거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전혀 아니다. MTV를 상징하는 곡이라고도 할 수 있는 더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흘러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영향력은 미미했다. MTV가 개국을 할 때 첫 뮤직비디오는 뉴저지 북부의 케이블 시스템을 이용하는 2000여 명만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MTV가 처음 컨셉은 볼 수 있는 라디오였다. 비디오를 소개하는 VJ가 나와서 라디오의 DJ처럼 곡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트는 대신 뮤직비디오를 트는 식이었다. 초창기 MTV의 슬로건은 스테레오로 즐기는 위성방송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점을 엿볼 수 있다.
MTV의 영향력은 이후로 커져만 갔는데 뮤직비디오라는 것은 이전까지 비교적 생소한 개념이었지만 MTV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많은 음반사들과 아티스트들은 뛰어난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뮤직비디오의 영향력은 절대적인 수준에 올랐고 음악이 아닌 비디오로 성공하는 가수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거장 감독들이 된 스파이크 존즈, 미셸 공드리, 데이비드 핀처와 같은 영화 감독들은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활약을 했었고 당시 MTV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이름이었다.
MTV는 이후에도 다양한 변신을 거듭해 나갔고 채널 또한 늘려 갔다. 지금은 음악과 관련된 부분은 대부분 새로운 채널인 VH1에서 담당하고 있으며 MTV는 종합 오락채널이 되어서 리얼리티 쇼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는 중이다. 음악계와 텔레비전 업계의 일대 센세이션이 된 MTV는 여전히 그 인기를 자랑하고 있다.

1936년 8월 9일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다

손기정은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으로 신의주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지금의 양정고등학교인 양정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유학길에 올라 메이지 대학법대에 입학했다. 그의 집은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고 손기정은 학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육상의 꿈은 놓지 않았다. 그는 중학생 때부터 육상을 했는데 매우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 13개의 마라톤에 참가하여 이중 10개 대회에서 우승을 한 경력이 있었다.
손기정은 일제강점기였던 1936년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 올림픽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올림픽 신기록은 2시간 29분 19초를 경신하면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손기정의 마라톤 금메달 소식은 한국인들에게도 희망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조국의 상황을 알고 있기에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금메달을 수여받을 때의 그의 표정은 어두웠고 올림픽 경기 직후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는 슬프다라는 석자가 적혀있었다.
손기정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은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이어진다.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손기정이 금메달을 획득하는 장면의 사진에서 그의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지워버렸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두 신문은 조선총독부와 마찰을 일으켰고 조선중앙일보는 재정문제 등으로 폐간을 하였으며 동아일보는 무기정간처분을 당했다. 당시에 사건을 주도한 동아일보의 기자들은 구속되었고 언론에 참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2005년 8월 25일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플로리다에 상륙하다

2005년 최악의 피해를 준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플로리다에 상륙했다. 하지만 플로리다에는 커다란 피해는 주지 않았다. 뉴올리언스로 진행을 한 허리케인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피해를 주었다. 물바다가 된 뉴올리언스 때문에 이재민 6만명이 경기장에서 지내게 되었고 2만명이 실종되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공식기록으로는 7300여 명이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카트리나가 엄청난 피해를 낸 것은 뉴올리언스 일대가 해수면보다 낮아져 있었기 때문이다. 뉴올리언스 제방의 관리악화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운하공사로 지반이 악화된 상황에서 간척사업을 진행한 것이 피해를 키웠다는 분석이다.
카트리나는 미국사회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드러내주는 일이기도 했다. 뉴올리언스의 피해지역에는 인구 대부분이 흑인이었고 인종차별 문제가 불거졌다. 실제로 많은 유색인종 할리웃 스타들은 부시 대통령의 사고처리가 인종차별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카트리나가 지나가고 피해복구가 한창일 때 한 병원에서 회복이 힘든 중환자 34명을 안락사 시킨 사실이 밝혀져서 엄청난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1227년 8월 18일 칭기즈칸이 사망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을 꼽는 설문조사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인물이 칭기즈칸이다. 유럽과 아시아가 서로를 미지의 세계로만 알던 시절에 칭기즈칸은 직접 유라시아 대륙을 정벌한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어렸을 때는 부족장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가 적대적인 부족장들에게 독살을 당하면서 부족은 거의 멸망직전에 이르렀다. 그 이후는 그에게 엄청난 시련만이 있었고 그야말로 초원에 던져져서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조금씩 힘을 키워 몽골을 통일했다.
이후에는 모두가 아는 역사대로 흘러간다. 그는 정복왕이 되었다. 서하와 금나라를 차례대로 원정을 하면서 그의 막강한 군사력을 뽐내었다. 특히 금나라는 칭기즈칸의 증조부인 안바가이 칸을 끌고 가서 능지처참한 일이 있기에 반드시 복수를 위해서 정복해야겠다고 결심했고 결국에는 정복했다.
이후 그는 중동의 강자로 군림하던 호라즘 왕국과 교역을 하는데 사절단이 호라즘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호라즘 왕국 점령에도 나서게 된다. 20만 대군을 이끌고 호라즘 원정을 떠난 칭기즈칸은 40만에 달하는 호라즘 왕국의 군대를 전략과 전술을 가지고 완벽하게 무너뜨렸고 결국에는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왕이 되었다.
칭기즈칸은 이에 멈추지 않고 서하를 완전히 정벌하기 위해 직접 출정을 감행했는데 서하 원정 도중 칭기즈 칸은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당시 이미 60세가 넘는 노인이었던 그는 이로 인해 치명상을 입었고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서하정복에 대해 지시를 내리다가 결국 전쟁터에서 사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