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의 검투사 19대 국회 강남 을 김종훈 의원

김종훈 의원은 대구에서 출생했으며 교직에 몸 담으셨던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를 모셨다. 어릴때 공부에 관심이 없고, 책을 많이 읽으며, 친구 사귀기를 좋아하는 흰 얼굴에 통통한 모습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그는 "백돼지" 애칭으로 통했다. 중학생이던 시절, 친구들과 "15소년 표류기" 처럼 전세계를 항해하자고 약속을 하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한동안 모은 뒤 친구들과 배를 사려고 부두에 나갔는데,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에 또 다시 다른 계획을 세웠다. 뗏목을 직접 만들어서 떠나자고 합의를 보고, 통 나무를 사러 다니기도 했었지만, 나무도 학생이 모으기에는 너무 비싼 가격이었고, 결국은 뗏 목도 제대로 만들어 못했다. 천진 난만하던 어린시절 친구들과 그때의 기억이 참 흐뭇하다고 한다.

공부에 취미가 없어서 성적이 높지 않았는데 고교 3학년이 되면서 정신을 차리고 학업에 전념을 해 연세 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을 하게되었다.
당시 집안이 넉넉치 않아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충당해야 했다. 주변의 부자집에 입주 가정교사를 하기도 했고, 그것도 사정이 여의치않아 새벽에 신문배달을 주로 했었다. 언젠가 겨울에는 노량진역 근처에서 우유배달직을 하기도 했다. 우유회사에서 자전거 1대에 우유병이 24개 들어있는 박스르 4개를 쌓아주면 추운새벽 동네를 약 2시간정도 돌면서 우유를 배달했다. 우유 한 병당 약 2원을 벌었다. 몇 일을 해서 어느정도 모았다 싶었는데, 자전거가 빙판에 미끌어지면서, 우유병이 모두 깨져버렸고, 자전거도 망가졌다. 다쳐서 아팠지만, 몸이 아팠던 것 보다 그동안 모았던 모든 돈을 털어서 배상을 하고나서 실망이 컸었던 적이 있다. 당시는 무척 힘들었지만 지금은 좋은 추억으로 기억한다.

대학에서 배우는 경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떨결에 선택한 경영학 전공을 하고 있었는데,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에 접어들면서, 경영학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경영을 잘해서 비지니스를 하고 결국은 돈을 버는것이 목적인 실리만 따지는 학문이라는 생각에 뭔가, 좀 더 뜻이 높은 다른 학문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국위를 선양하고, 세계로 나가 한국을 알리는 외교관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경영학 전공이어서, 경영학 과목들을 이수해야 했는데, 추가로 정식으로 등록은 못하고 정치 외교학 과목들을 주로 청강을 하면서, 보람과 즐거움을 한껏 느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외무고시 1, 2차를 모두 합격하게 되었다.

첫 외교관으로서의 발령은 프랑스였다. 2년간 프랑스에서 업무를 즐겁게 익히며 정을 붙일 무렵 아프리카의 "어퍼볼타"라는 생소한 나라에 영사로 발령을 받게되었다. 현재 이 나라는 "그루티나 파솔"이라고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 나라에 도착했을때가 1980년이었다.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이 1650달러 였는데 이 나라는 100달러가 채 안됬다.
도착을 하니 한국인은 대사가족과 우리가족밖에 없었다. 그 나라 주민들의 삶을 보니 너무 헐벗고, 거의 동물들처럼 사는 수준이어서 기가 막혔다. 그러던 중, UN 통계를 찾아보고는 놀랐다. 1970년도 한국의 국민소득이 100달러 정도였기 때문이다. 약 10년동안 한국은 급격히 16배이상 성장을 해왔던 것임을 깨달았다.

그곳의 날씨는 너무나 뜨거웠다. 차량 안에 플라스틱 볼펜을 놓고 내렸다가, 한참 후에 다시 타보니 흰 플라스틱 볼펜이 휘어서 다 녹아 내려 있을 정도였다.
당시 집에 요리사와, 가정부, 그리고 경비원을 고용해야 했는데 대략 한명에 20달러정도를 지불했다. 하루는 요리사의 집에 한번 같이 가자고 부탁했다, 약 20분정도 차량으로 달리는데 집에서 약 5분정도 가자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고, 한참을 길 표시도 없는 곳을 달려가니 그가 사는 곳에 당도했다.

그는 회교였기에 부인이 4명이나 있었다. 한국의 황토같은 토담에 지붕은 양철로 되어있는 움막 같은것들을 조그맣게 몇개 지어놓았고 문이라는것이 없엇다. 토담의 아랫쪽에 조금 뚫어놓았는데 그곳을 통해서 집에 기어들어갔다 기어나와야 했다. 집안은 흙바닥인데 오랜 세월 사람들이 이불도 없이 앉고 눕고 해서 흙바닥이 반들 반들 하게 윤이 나있었다. 음식도 너무나 열악했다. 그들의 삶을 직접 보고나서 강력한 자극을 받았다. 그 때 국가의 정책과 노력이 국가의 부를 축적하고 국민들이 경제적인 안정을 얻는데 절실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고 경영과 경제가 아주 중요하다는것을 새롭게 깨달았다.

어퍼볼타 근무당시 혁명정부가 들어서고 역사상 최초로 선거를 치루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넓은 마당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였고 무슨 박스 같은것을 놓고 그 위에 한 명씩 올라가서 현지어로 유세 연설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주민들에게 원하는 후보 앞에 줄을 서라고했다. 줄도 안 서본 주민들은 한 줄로 똑바로 못서고, 줄들이 서로 이리저리 얽히게 되었고 당시 치안 경찰인 군인들이 막대기 같은것으로 주민들을 때리며 똑바로 서도록 정리를 했다. 어린아이들도 모두 참여했다. 한 후보의 줄이 월등히 길었고 그가 당선되었다. 비록 정리된 규정이 없었지만, 원하는 사람앞에 자유롭게 설수 있는 최초의 민주주의 선거가 무사히 치루어진 역사의 순간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그에게 정치를 하는것 과 외교업무를 하는것중 어느것이 더 보람있는지를 묻자, 둘다 중요하고 보람있는 일임에는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치는 정말 놀랍도록 다양한 이해관계와 공동체의 조화, 계층간의 충돌이 아우러져있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란것을 실감한다고 전한다.

향후 정치를 꿈꾸는 후진들이 명심해야할 조언을 물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근본적인 정치에 대한 기본 키워드는 "국리민복(國利民福)" 즉 국가의 이익과 민간인의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동선과 함께 합리적이며 조화로운 따뜻한 민주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치에는 정치에 대한 본인의 의지가 확실한 사람만이 임해야하며 정치인들은 모두 개인의 전문 분야에 대해 많은 공부를 지속하며 활용해야 한다고 전했다.

여가시간에 하는 취미가 무엇인지 물었다. 젊잖아 보이는 정치인의 취미로는 놀랍게도, 그는 행글라이더, 패러글라이딩, 카이트보드, 윈드 서핑, 모터 사이클, 스피드 사이클을 즐긴다고 했다. 김의원이 건강미 넘치는 모습을 갖추고 있는 이유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사회에 여러가지 기여를 지속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고 또 이제 귀여운 손녀도 태어났고 해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좋은 시간도 많이 보내고 싶다고 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고장 샌프란시스코 출신 김종훈 의원, 그가 항상 건강하고,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좋은 일들을 더욱 많이 하게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