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역사

1979년 7월 1일 소니가 최초의 워크맨을 출시하다

전세계 음악사와 기술사를 완벽하게 바꾸어놓은 워크맨이 처음 출시되었다. 일본의 가전제품 메이커 소니에서 발매된 이 제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당시 LP에 밀리면서 자리를 못잡고 있던 카세트 테이프라는 기술표준이 단번에 앞서나가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워크맨의 아버지라 불리는 쿠로키 야스오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부하 연구원 중 하나가 자사 소형 녹음기를 개조해서 음악을 듣는 걸 보고 개발을 했다고 한다.
처음 출시되었을 때 워크맨은 39만엔 이라는 엄청난 고가였다. 하지만 이후에 다양한 경쟁제품이 등장했고 이후에 값이 싸지면서 대중화되었다. 많은 유사상품이 전세계에서 쏟아졌음에도 워크맨의 위상은 굳건했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소형기기가 워크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도 많았다. 소니는 이후 CD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재생하는 기기들에 모두 워크맨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판매했고 현재는 스마트폰 기기에도 워크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워크맨이라는 브랜드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잘 보여주는 예다.
하지만 워크맨이 '도작'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독일 출신 발명가 안드레아스 파벨은 1976년 워크맨과 비슷한 기기를 만들어 소니에게 판매하려고 시도했다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파벨은 1차 승소를 하기도 했지만 소니가 거물급 변호사를 선임하고 파벨의 증거물들이 도난 당하면서 패소를 했다. 하지만 이후 밝혀지지 않은 누군가가 파벨을 도우면서 패소로 인한 빚을 갚았고 결국 2004년 소니는 8000만 달러라는 거금과 앞으로 워크맨으로 생기는 수익에 대한 일부 양도를 합의했다. 파산한 파벨을 도운 것은 소니의 경쟁업체일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1948년 7월 12일 제헌국회가 대한민국 헌법을 의결하다

1948년 5월 10일 UN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대한민국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첫번째 총선거가 실시 되었다. 그렇게 198명의 제헌의원들이 뽑히게 되었다. 제헌의회는 5월 31일에 제1차 회의에 들어갔고 최고연장자였던 이승만을 임시의장으로 추대를 했다. 부의장은 신익희로 선출되었다.
이후에는 헌법 초안을 만드는 과정이 계속되었다. 6월 초에는 국회 헌법기초위원회에 헌법 초안이 제출되었다. 이승만을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정파들이 의원내각제를 하자고 동의를 했기에 대한민국 정부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6월 15일 돌연 기초위원회에 나타나 의원내각제를 대통령제로 바꿀 것을 종용했다. 이후 대통령제로 바뀐 대한민국의 첫 헌법이 의결되었다. 1948년 7월 12일의 일이었다. 7월 17일에는 헌법이 공포되었으며 7월 20일 제헌국회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에 의한 제1대 대통령 선거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제헌의회는 정부 수립 이후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반민족행위처벌법이었다. 반민족행위를 한 인사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려는 움직임은 현대사의 비극 중 하나인 반민특위 사건으로 인해서 무산되었지만 역사를 바로 세우려 한 시도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테러가 일어나다

2011년 7월 22일 오슬로 정부청사에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이 테러로 총리실 건물이 크게 파손되었으며 석유부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여 7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더욱 더 끔찍한 일은 오슬로 북서쪽 30km에 위치한 우퇴위아 섬에서 일어났다. 노동당 청년캠프 행사장에 괴한이 난입해 총기난사 테러를 한 것이다. 당시 우퇴위아 섬에는 10~20대 학생 700명이 정치캠프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있었다. 이 섬에는 무장한 사람이 범인 1명뿐이었고 범인은 경찰복을 입고 있었다. 결국 일어난 것은 끔찍한 학살이었다. 범인은 아이들을 가까이 오라고 유인한 후 총을 쏘는 악랄함을 보여주었고 1차 총격을 피한 청소년들이 건물 안에 숨어있자 보트가 구조하러 왔으니 이쪽 오라고 이야기를 해서 밖으로 나오는 사람을 다시 쐈다고 한다. 1시간 30분 후 급히 출동한 경찰특공대가 섬에 상륙하자 범인은 투항했다. 하지만 이미 77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상태였다.
체포 된 이후 밝혀진 그의 이름은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 극우단체의 회원으로 알려졌으며 미래의 노동당원을 모두 죽여버리겠다며 테러를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브레이비크는 범행동기를 밝히는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 등의 단일민족 국가를 칭송하면서 외국인 혐오 성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평소에 대인관계에서도 문제가 있었으며 여자를 잘 사귀지 못해서 좌절했다고 한다. 이성관계에 남보다 관심이 많음에도 실패를 했음이후에 밝혀졌다. 예쁜 여자아이들부터 죽였다고 말하는 점이 이러한 범인의 성향을 보여준다.
이후 브레이비크는 재판과정에서 정신분열증을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고 결국 법정최고형인 징역 21년과 예방적 구금이 선고되었다. 브레이비크는 이에 항소하지 않았고 형량은 확정되었다.

1867년 7월 25일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완성하다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변호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지역에서는 천재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종교와 철학에 심취했고 결국 아버지는 걱정 끝에 그를 베를린 대학 법학과로 전학시켰다. 하지만 그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탐구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학생시절 적극적인 정치운동을 벌이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고 박사학위 취득 후 대학에서 강연을 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졸업 후에는 신문사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정부 비판적인 기사를 많이 게재했고 역사와 철학보다는 현실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된다.
1843년 카를 마르크스는 귀족 집안 출신의 제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을 한 후에 거처를 옮겼다. 여기에서 초기 사회주의자들과 만남을 가지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의인동맹이라는 비밀결사에 가입했지만 의인동맹이 국왕 암살을 기도하다 실패하면서 그도 파리를 떠나서 브뤼셀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의인동맹은 공산주의 연맹이 되었고 창당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산당 선언을 저술하였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마르크스는 이후 영국으로 망명을 하여 그 곳에서 다양한 저술활동을 펼쳤다. 영국에 있을 때 그는 매일 대영제국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10시간 이상 공부를 했고 자신의 모든 통찰과 지식을 모아서 불멸의 저서 하나를 내게 된다. 그것이 1867년에 발간 된 자본론이다. 이후 자본론은 100년간 계속되는 논쟁을 불러오고 공산주의 국가의 등장이라는 세계적인 역사의 시발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