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역사

1929년 10월24일 주가 대폭락과 대공황의 시작

'암흑의 목요일' 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속에 기록된 1929년 10월24일 목요일 세계 대공황의 시작을 알리는 듯 뉴욕의 월 가에 있는 주식 시장에서 주가가 사상 유례없이 폭락했다. 바로 전날까지 치솟기만 하던 주가가 별안간 폭락하면서 사람들은 주식을 팔기 위해 주식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지만 주식을 살 사람은 없었다. 다행이 오후에 은행가의 큰 손들이 방어에 나서며 주가가 회복되기도 했지만 5일 후 주가는 다시 폭락했고 몇 시간 만에 주식시장에는 무려 1,650만주가 쏟아져 나왔다. 또 하루 동안 다우존스 평균지수가 40포인트나 떨어졌으며 100억달러가 휴지조각이 됐다. 세계 제1의 경제 대국이었던 당시 미국은 표면상의 번영 이었을 뿐 막다른 골목을 향하고 있었다. 승용차, 주택 건설도 모두 감소했으며 공업 생산 및 가격의 하락은 눈에 띄게 진행되었다. 반면 소수 상류계급의 부의 집중은 심화되었고 돈을 가진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주식을 사며 주가를 올렸지만 결국 낭떠러지로 추락했다.

2001년 10월5일 미국 '탄저균 테러' 공포

911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탄저균 테러로 미국이 또 한번 공포에 빠져들었다. 2001년 10월5일 미국 플로리다 주 '아메리칸 미디어' 직원 중 한 명이 탄저병으로 사망하면서 탄저 테러가 세상에 알려졌고 아메리칸 미디어 직원 여러명이 탄저병에 감염되었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뉴욕, 네바다주 등으로 확산되면서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에 탄저 테러의 위협이 가해졌다. 탄저 테러는 편지를 통해 시작됐다. 탄저균이 담긴 편지는 독일 슈뢰더 총리, 미국 민주당 톰 대슐 상원의원, NBC 방송 뉴스앵커 톰 브로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등 곳곳으로 배달되었다. 그리고 이중 톰 대슐의원에게 발송된 편지에서 노출된 탄저균으로 인해 직원 19명이 감염되었고, 플로리다주 타볼로이드판 신문인 '더선' 의 사진 편집인인 밥 스티븐슨은 결국 탄저균에 의해 사망했다. 이 때문에 NBC방송 뉴스 편집실이나 의회 건물 등이 폐쇄되는 등 혼란에 빠졌다. 결국 2001년 탄저균 테러로 5명이 사망했고 17명이 감염되어 치료를 받았다. 이 테러는 사건 발생 7년만인 2008년 8월 테러의 유력한 용의자로 미 육군 연구소의 미생물학자 브루스 아이빈슨을 꼽았고 수사가 진행되던 중 아이빈스가 자살하면서 수사를 공식으로 종료했다.

2001년 10월26일 경복궁 흥례문 복원

조선 총독부 청사 건립으로 인해 1916년에 강제 철거 되었었던 경복궁 흥례문이 85년만에 복원되었다. 흥례문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으로 세종8년(1426년)에 집현전에서 '예를 널리 편다' 는 뜻의 홍례문으로 이름을 지었었는데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휘홍력을 피해 지금의 흥례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홍례문 공사는 총6년간 진행되었으며 총 예산 233억원을 들여 완성되었다. 공사에는 대목수인 신응수씨를 비록해서 연인원 약 2만9천여명이 참여했으며 흥례문 뿐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유화문과 기별청 그리고 궁궐 서북쪽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여 만든 금천과 그 위에 있던 영제교도 다시 세워졌다.

1904년 10월27일 뉴욕의 첫 지하철 개통

1904년 10월27일 뉴욕에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지하철 개통식을 보기 위해 이날 뉴욕 시청 주변에는 6천여명의 군중이 모였고 뉴욕 시민들은 기차와는 다른 지하철이 시청에서 할렘가 까지 15분만에 주파하는 것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뉴욕의 첫 지하철은 4년 7개월 만에 탄생했다. 당시 뉴욕 시청에서부터 145가까지 운행했던 뉴욕 지하철은 현재는 총 722마일 구간에 469개 역을 잇는 세계 최장의 지하철이 되었으며 하루 평균 이용객만 35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미국 최초의 지하철은 뉴욕보다 6년 앞선 보스턴 지하철이며 세계 최초의 지하철은 영국 런던으로 1863년 증기기관 차를 이용해 만들어져 운행되었다.

2002년 10월31일 대한민국 여군학교 폐교

1950년 9월4일 임시수도 부산에서 발족된 대한민국 유일의 여군학교가 창설 52주년이 되는 2002년 10월 31일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여군학교의 첫 시작은 491명의 지원을 받아 발족된 여자의용군 교육대였다. 당시 여자의용군은 전방사단에 배치되어 정보수집, 수색활동, 선무활동을 주로 했으며 후방에서는 일반 행정요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1954년 2월 여군부로 승격, 개편돼 모병과 교육을 실시했다. 여군부는 1990년 여군학교로 승격했으며 여군 장교와 하사관 육성기관으로 발전했다. 여군학교에서는 행정분야에서 벗어나 공병, 정보, 보병 및 정책 부서 등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교육했고 이에 따라 여군 병과도 더 많은 범위로 넓어졌다. 그리고 2002년 10월 31일 군내 남녀차별을 없애고 여군의 자질 향상을 위해 여군학교를 해체했다. 이후 여군장교와 부사관 양성과정을 각각 경북 영천의 제3 사관학교와 전북 익산의 육군부사관학교에 편입, 통합 운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