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A 8승을 이룬 한국 골프계의 신화 - 최 경주 프로 골프 선수
PGA 8승을 이룬 한국 골프계의 신화 초심을 잃지 않는 의리의 사나이 재단을 통해 가진것을 나누는 최 경주 프로 골프 선수
다부진 체격에 마치 호랑이의 눈처럼 빛이 발산되는 듯한 눈매를 가진 최경주 프로골프 선수를 몬트레이에서 만났다. 그는 후배 프로골퍼들을 오랜세월 자상하게 보살펴주고, 초창기 어려웠던 시절 정성껏 도움을 베풀어준 사람들을 잊지 않고 우정을 지키는 의리의 사나이로 통한다. 그는 대회 참가 시기에도 예배에 꼭 참석하며,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여행할때 제일 행복하고, 골프 경기가 잘 안 풀리면, 경기를 숨죽이며 보고있는 자녀들에게 가장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 전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수많은 골퍼들이 최경주를 알아보고 선망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타 의식없이 참으로 소탈하고, 따뜻하며, 첫 골프를 시작했을 때의 열정으로 매진하고 있다. 최경주, 그가 2승만 더 거두면 미국 PGA골프대회의 명예의 전당에 오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조만간 2승을 꼭 거둬서 한국인으로서 꼭 이름을 자랑스럽게 남겨주기를 기원한다. 만난사람 발행인 아이린 서
최경주의 어린시절
최경주(崔京周)는 1970년 5월 19일 전남 완도군 완도읍 대신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각종 운동에 소질을 보여 완도 화흥초등학교 시절 축구와 역도 선수로 활약했다.
그가 완도라는 외떨어진 섬에서 처음에 역도에 관심을 갖고 2년동안 열심히 연습했는데, 역도선수는 팔 다리가 짧아야 유리한데, 그는 몸과 다리가 통나무 같이 튼튼하고 조건이 좋았지만, 팔이 키에 비해 유난히 길어 불리한 신체조건이었고 실력이 많이 늘지 않았지만 야구와 역도를 하면서 신체 유연성과 안전한 자세등 기본적인것을 잘 익혔고 나중에 많이 도움이 됬다.
완도수산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는데, 입학식에서 역도해 본 사람? 하고 한 선생님께서 물어보셔서 손을 번쩍 들었다. 10명이 나섰는데 두 줄로 세우시더니한 줄은 역도, 다른 한 줄은 골프라고 하셨는데 골프쪽 줄에 서 있던 그는 살짝 역도 줄로 옮기려다 저지당했다. 그는 "사람은 정말 줄을 잘 서야 한다"고 웃으며 강조했다. 골프부에서 연습을 할때 감독님이 연습장에 떨어진 수천개 정도되는 공을 주우라고 하시며, 7 번 골프채를 하나씩 나눠주고 골프공을 쳐서 멀리 보이는 기준점을 넘기면 연습 공 주워오는 일을 열외시켜 주겠다고 했다. 학생들이 차례대로 치다가 그의 차례가 돼서 치는데, 치는 순간 홈런 10배의 감이 오며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때 7번 아연으로 130 야드를 쳤다. 지금도 그때 모습과 감이 남아있다고한다. 마치 불쏘시개에 불을 당긴 듯 그때 그의 마음에 불씨가 타올랐다.
그가 골프를 하겠다고 하자 수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돈이 얼마나 드는 운동인데, 부모 등골 빼먹으려 그러느냐 등등. 그래서 돈 안드는 방법을 연구했다. 골프치는 분들의 골프클럽과 공을 닦아주자 빵 사먹으라고 만원씩 줬다. 당시 빵 한 개에 500원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만원이 2만원 되고 2만원이 3만원이 되어갔고, 연습도 하면서 돈을 벌었다. 어른들이 공을 칠 때 그가 족집게처럼 한마디씩 조언을 해주면 아주 좋아하셨다.
그는 광주 골프장에 가서 산에 널려있는 공을 50개씩 주워 빨래비누와 수세미로 깨끗이 닦아 좋은 건 갖고 쓸 만한 건 골프장 손님들에게 팔았다. 골프를 시작하면서 부모님께 8만원 받은 이후 단 한 번도 경제적인 부담을 드리지 않았다. 불철주야 매진하는 그의 연습량은 어느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을 정도다.
최경주의 골프 프로선수로서의 전적
1993년 프로테스트를 단번에 통과하였고 1996년 코리아 오픈에서 첫승을 한 뒤 1996, 1997년 2년연속 상금 1위에 올라 국내 최고의 남자 프로 골퍼로 인정받게 되었다. 국내에서 7승을 거둔 그는 그해 일본프로골프(JPGA)에 진출해 기린오픈과 우베고산오픈에서 승리했고, 메이저대회인 브리티시오픈에서 컷오프를 통과했다.
1999년 최경주는 PGA 투어 자격심사에서 공동 35위에 올라 한국 남자로는 처음으로 미국 PGA 프로 무대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2001년 그레이터그린스보로 클래식에서 공동 4위에 오르는 등 5위권 입상 3번을 포함, '톱10'에 5번이나 진입하며 상금랭킹 65위(80만326 달러)에 올랐다.
2002년 5월 6일 뉴올리언즈 미국프로골프(PGA) 컴팩클래식에서 우승해 100여년이 넘는 골프 역사상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PGA투어 대회를 제패했다. 동양인으로서는 아오키 이사오(83년 하와이오픈) 와 마루야마 시게키(2001년 밀워키오픈)에 이어 세번째 PGA 무대 정복이다. 같은 해 탬파베이 클래식에서도 우승했다.
통산 PGA에서 8승을 거뒀는데, 차례로 2002년 콤팩 클래식, 2002 년 탬파베이 클래식, 2005년 그리스보로 크라이슬러 클래식, 2006 년 카라이슬러 챔피언쉽, 2007년 메모리얼 토너먼트, 2007년 AT&T 내셔널, 2008년 하와이 소니 오픈, 2011년 플레이어스 챔피언쉽에서 우승했다. 최경주는 PGA 8승 뿐 아니라, 유럽투어 1승, 아시아 투어 4 승, 일본 투어 2승, 기타 프로투어 3승을 거두는등 세계 프로대회에서 18승을 거뒀다.
최경주는 172㎝, 82㎏의 탄탄한 체구에 역도로 단련된 강한 다리힘과 어깨 근육을 바탕으로 외국 선수들에 뒤지지 않는 간결하고도 힘있는 스윙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검은 피부와 강렬한 눈매 때문에 국내에서는 '필드의 타이슨'이라는 별명으로 가졌으나, 지금은 미국 언론들 사이에선 '탱크'로 불린다.
최경주와 주변 인물들
그는 PGA 우승컵을 안기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다고 전한다. 서울 한서고 재단 김재천 이사장이 당시 희망이 뭔지, 꿈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얼떨결에 골프를 시작한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서울로 이끌어주었다. 17살 당찬 소년이던 나는 장학금을 받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골프를 배울 수 있었다. 그가 서울로 올라간 후 완도 골프 연습장은 문을 닫았다고 한다. 만약 그가 그 때 게으름을 피웠다면 지금의 최경주는 없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주변에 계신 분들이 가만 두지 않으시고 계속 필드에 데리고 나갔다. 최경주가 하고 있는 모습이 주위 사람들에게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준 것이다. 그리고 그 분들이 후원자들이 됐다. 도움을 주신 분들을 생각하며 남들보다 더 열심히 연습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했다. 연습하고 나서 그립을 푸는데 그립이 풀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그립을 잡고 공을 너무 치니까 손이 풀리지 않았을 정도였다.
골프장에서 연습 프로로 일하며 청소를 했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손님들의 골프백에 쌓인 먼지를 닦고, 오래 되어 녹이 슨 골프채의 녹을 닦아냈다. 우리가 처음에는 먼지를 우습게 생각하지만 1-2년 되면 그것을 닦기 매우 어렵다. 묵어서 굳기 전에 깨끗하게 청소를 해야 한다. 우리 인생도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먼지가 쌓이는 것을 보고만 있으면 나중에는 처리하기 어렵게 된다. 또 당시 손님들이 깨끗한 매트에서 연습할 수 있도록 아침 일찍부터 매트를 청소했다. 사람들은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일 때 감동했다. 그의 어머니는 물 떠 놓고 소원을 빌면서 아이들을 키웠다. 1년에 12 번의 제사를 드릴 정도로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1993년도에 부인을 만났다. 데이트 하고 싶으면 교회에 와야 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교회에 갔다.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교회에 갔다. 그 전에는 '교회에 뭐 하러 가느냐? 다 쓸데없다'고 말했는데 교회에 나가면 뭔가 나한테 이야기하는 듯하고 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예배 중심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경기 때문에 주일예배를 못 드리면 수요예배에 꼭 간다. 게임 중에 수요예배를 드리면 보통 11 시 이후에 잠을 잘 수 있다. 다음날 새벽 5시에 나가야 하기 때문에 피곤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이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다. 정신이 멀쩡하면 육체는 따라온다. 골프의 기본은 그립을 갖추는 것이다. 잘가기 위해서는 기본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 기본이 없으면 좋은 지식과 능력이 있어도 공은 바로 가지 않는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기본이 있어야 한다.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본이 있어야 한다.
'최경주 재단'을 통해 나누는 삶을 살다.
그는 1993년도에 사랑 나눔을 시작했고, 2007년에 최경주 재단을 만들었다. 청소년들은 20년 후에 우리나라를 짊어질 일꾼이므로 기성세대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재단을 통해 도움을 받고, 제대로 된 훈련을 받으며 무척 좋아하고 있다. 그는 학생들 생각을 하면 잠이 오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우승해서 이 상금을 벌면 학생들에게 가겠지, 얼마나 좋아할지 생각할 때 그는 힘이 생긴다 그는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라 생각하며 처음에 올 때도 제로로 왔는데 마지막 가는 길에도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없다. 재단을 통해서 조금씩이라도 베풀면서 삶을 살아갈 때,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자녀가 3명이 있는데 적용하는 두 가지 철칙이 있다. 첫번째는 아이들과 있을 때 절대 TV를 보지 않고 대화를 하는 것, 두번째는 아이들이 자기 전까지 잠들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골프를 시키니까 피곤해서 금방 잠이 든다. 운동을 하지 않는 아이들은 몸이 피곤하지 않으므로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게임을 한다. 컴퓨터나 게임으로 각각 놀기 때문에 서로 소통도 잘 되지 않는다.
현재 부인 김현정씨와 자녀 셋과 함께 텍사스 달라스에서 거주하고 있는 최경주는 미주 한인들의 응원이 언제나 감사하다고 한다. 그도 십수년을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그에게도 다른 많은 이민자들 처럼 미국생활은 언어.문화, 심지어 경제적인 부분까지 결코 쉽지 않았다. 어려운 때일수록 한걸음 물러서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잠시 되돌아보곤 했다고 한다. 너무 앞만보고 가다보면 지치게 되는데, 가는길을 되돌아보면 다시 어디로 가야할 지 길이 보이게 되고, 언젠가 이루어 질 것이라는 긍정적인 힘을 갖고 최선을 다할때 최고의 결과가 온다고 믿는 만큼, 미주 한인들도 어려운 때 일수록 힘을 냈으면 좋겠다고 독자들에게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