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역사

1930년 1월 24일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 암살되다.

청산리 독립전쟁의 영웅, 대한 독립군의 총 사령관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되었다.

백야 김좌진 장군은 좌, 우가 아닌 오로지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하는 민족주의에 입각해 일생을 바쳤다. 17세에 만석지기의 가산을 노비들에게 나눠주며 해방을 시켰고, 99칸에 이르는 집에 학교를 세우고, 북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을 했다. 독립운동으로 일본군과 싸우면서도 주둔하는 곳마다 독립군의 후손들을 위해 20여개의 학교를 세우기도 했으며, 그 중 중국 흑룡강성 해림시에 있는 조선족 실험소 학교는 지금도 그 역사를 유지하는 우수한 학교다.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독립전쟁에서 모든 상황이 열악하고 구식 무기 밖에 갖추지 못한 독립군 1500명에게 불굴의 투지를 일깨워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 정규군 2개사단 5만명을 상대로 전쟁을 치뤘으며 3300명의 사상자를 낸 세계 전사 상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정도의 대승을 거둔 탁월한 명장이며 전략가였다.

이후에도 항일무장투쟁으로 일관하며,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직접 군사교육도 하고 독립군들과 농사도 지으며 강력한 독립군의 양성으로 국내에 진공하여 독립을 쟁취하는 일에 몰두했다. 국가와 민족이 부강해야 어느 위기에서도 당당하게 대처하고 굴욕적인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하나로 달려온 업적들이다. 하지만 북만주 중동선 산시역 부근의 정미소에서 공사주의자 박상실이 쏜 흉탄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김좌진 장군의 장례식은 전례없이 성대한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동포뿐 아니라 중국인들까지도 장군의 죽음을 애도했다.

1933년 1월 5일 샌프란시스코에 골든 게이트 브리지 공사가 시작되다.

골든게이트 브릿지는 1928년에 설립되어 설계, 공사, 재정에 관한 업무로 시작되었다. 다리의 설계는 조지프 스트라우스가 맡았고, 채색은 건축가 어빙 머로우가 맡았고, 이 밖에도 안전을 위한 모든 것들은 유명 공학자들이 담당했다. 건설 사업에는 샌프란시스코 시와 매린카운티 외에 나파, 소노마, 맨도시노, 델 노르테 카운티가 포함되었고, 각 카운티의 대표가 이사회를 구성하여, 채권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했다. 총 3천 9백만 달러가 소요되었으며, 통행요금을 통해 1971년 채권을 모두 회수하였다. 골든게이트 브릿지는 1937년 4월 완공, 5월에 보행자에게 개방하는 행사를 가졌고, 5월28일 루즈벨트 대통령이 워싱턴 D.C에서 전신으로 개통신호를 보냄으로써 차량 통행을 시작했다. 골든 게이트 브릿지는 빨간색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짙은 오렌지색이다. 골든 게이트 브릿지 해역이 바다로 통하는 샌프란시스코 만의 입구이기 때문에 안개가 자주 끼는 점을 고려해 안전을 위해 눈에 잘 띄는 색인 인터내셔널 오렌지로 했다. 시속 100km를 넘는 바람과 안개, 빠른 물살로 인해 당시 만들기 불가능하다고 했던 다리가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로 꼽히며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이 되었다.

1863년 1월10일 세계 최초의 지하철이 개통되다.

세계 최초의 지하철, 런던 지하철의 개통은 이후 전세계 철도망의 근간이 되었다. 런던 지하철은 역이 270개이며, 선로의 길이는 약 250마일, 세계에서 가장 긴 노선이다. 역 당 수송하는 승객도 가장 많아, 2007년에는 10억명이 넘는 탑승객 수를 기록하고있다. 영국의 철도건설은 183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850년 경에 이르러 여섯 개의 독립된 철도 종점역이 런던 중심가 바로 밖에 설치되었다. 이 시기 기차를 타고 온 승객들이 도로 중심가로 가는 것 때문에 런던의 교통체증이 증가하면서 1830년대에 처음 계획되었던 지하철도망이 1850년에 들어서서야 교통 체증의 문제 해결책으로 본격적인 시작을 갖게 되었다.

초기 런던 지하철의 열차는 증기 기관차로 지상에 효율적인 환기장치 설치를 위해 도로위에 많은 통풍구를 만들어야 했다. 통풍구 설계는 도로의 외관을 보존하기 위해 집의 앞모습을 닮은 모습으로 하였고, 증기기관차는 훗날 전기동차 차량으로 대치되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키고 있는 런던 지하철은 오래된 만큼 비좁고 불편함이 있지만 그 반면에 따뜻한 느낌의 로망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길거리 악사들의 연주가 들려오고, 현재 공공 아트월에서 설치된 유니크하고 아트적인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오며, 색색의 모자이크 타일로 이루어진 공간은 이용객들에게 볼거리와 즐거움을 주고 있어 세계의 낭만 지하철이라 불리고 있다.

1982년 대한민국의 야간 통행 금지가 해제되다.

우리나라의 야간통행금지의 역사는 조선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통행금지 시간은 인정(오후 10시30분) 에서 파루(오전 4시30분). 단 조선시대에도 정월 초하루와 정월 대보름에는 행사를 위해 야간 통행을 허가했다. 광복 직후 서울과 인천에서 먼저 시작한 야간통행 금지는 한국 전쟁이후 전국으로 확대되어 총 36년 4개월동안 시행되었다. 통금이 시작되기 한시간 전에는 귀가를 위해 대중교통이 북새통을 이뤘으며 밤 12시 사이렌이 울린 이후에 통행하는 사람들은 경찰서에서 대기하다가 오전 4시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때에는 학원도 교습시간을 줄여 야간통금에 맞췄고, 야간통행 금지때문에 김포국제공항, 김해국제공항에 착륙하지 못한 국제선 비행기는 일본이나 홍콩, 타이완, 하와이, 알레스카등으로 회항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처님 오신날과 크리스마스와 12월31일에는 예외적으로 야간통행을 허가해 이날은 밤 늦도록 거리마다 많은 사람들이 밤거리를 즐기며 통금의 해방을 맘껏 누리는 풍경을 연출했다. 야간통행 금지의 폐지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1960년대 제주도와 충청북도에서 먼저 해제되었다. 또 수출산업과 관련된 수송 수단과 일부관광지가 해제되었고, 88 서울 올림픽에 대비하여 대한민국의 치안 안정과 안보 확보를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폐지를 결정하게 되었다. 야간 통행 금지 폐지는 국민의 기본권 보장과 국가 안보와 치안확보에 대한 자신감을 대외적으로 나타내는 의의가 있고, 실제적으로 경제활동이 활성화되었지만, 에너지 사용량 증가, 향락적인 사회환경조성, 청소년 범죄등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