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역사

8월 6일, 1991년 / 세계최초 '월드 와이드 웹' 브라우저 발표되다.

팀 버너스리가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 브라우저를 공개했다. 웹의 보급으로 일반인의 인터넷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용이해졌고 이용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됐다. 이후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사회, 경제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 양식에 까지도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그는 영국의 컴퓨터 과학자로 1989년 월드 와이드 웹의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을 고안하여 개발했다. 인터넷 기반을 닦은 '인터넷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한다. 컴퓨터 문외한도 다들 들어봤을 URL, HTTP, HTML를 설계한 것도 그이다.
월드 와이드 웹은 쉽게 이야기하자면 '정보 공간'이다. 전 세계인이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줄여서 '웹'이라고도 부른다. 흔히 웹과 인터넷을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사실 엄격히 다르다. 웹은 이메일처럼 인터넷을 이용한 하나의 서비스일 뿐이다. 원래는 전 세계에 있는 여러 대학과 연구소에서 일하는 물리학자들이 정보교환을 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한다. 문자나 사진 등의 정보를 신속하게 주고받고자 한 그들이 의도치 않게 미래를 바꾼 것이다. 그의 웹을 세계적으로 대중화 시킨 것은 일로노이 대학교의 마크 안데르센이다. 그가 개발한 소프트웨어인 모자이크를 통해 전세계인은 웹의 세계를 항해하기 시작했다. 세계인들은 다양한 정보를 찾아 다니고 글과 사진을 주고받게 된다. 그런 이들을 위해 웹사이트가 만들어지고 웹사이트에는 나날이 획기적인 기능들이 새로이 장착되게 된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동영상을 볼 수 있게 됐으며 물건을 사고 팔 수도 있게 되었다. 이제 전세계인들은 웹을 통해 친구 찾기도 하고 나의 일상을 세계로 쏟아내기도 한다. 정치가 이뤄지고 문화를 교류하고 경제활동이 일어난다.

8월 8일, 1974년 / 탄핵, 권력남용으로 말미암아 닉슨 대통력직을 사임하다.

대통령은 법 위에 있지 않다', 미국 역사상 임기 중 대통령이 사임한 초유의 사건,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문에 나오는 문구이다. 이 사건은 미국 역사에 오점을 남겼지만 동시에 의회와 최고재판소가 민주주의의 전통을 수호한 사건이란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한 정치를 견제하기 위해 언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인지를 명확히 제시한 사건이기도 하다.
워터게이트는 1972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재선운동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닉슨 측이 불법적으로 상대 진영에 대한 정보활동과 선거운동 방해공작을 하고 이를 은폐하려 했다. 워터게이트란 이 일련의 과정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닉슨은 재임 중 중국과의 국교 수립 등 나름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는데, 그의 재선이 불확실해지자 백악관의 참모들은 비열한 방법들을 동원한다. 1972년 6월17일, 워싱턴 워터게이트 호텔에 있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를 시도하다 실패한다. 익명의 고위관리에게 제보를 받은 워싱턴포스트지의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이 사건을 추적하게 되고 닉슨측이 불법적인 정보활동을 펼쳤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닉슨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항변했지만 점차 이사건의 은폐공작이 알려지고 여러 증언이 드러나자 결국 하원은 대통령 탄핵을 가결하게 된다. 결국 1974년 8월 4일,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의 은폐에 관여했으며 사건 발생 후 연방수사국에 사건을 축소하도록 지시했다는 사실을 자백하게 된다. 8월 8일 밤 사퇴성명을 발표하고 부통령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후임 대통령인 포드가 닉슨을 사면조치 하면서 워터게이트 사건은 마무리 된다.

8월 9일, 1936년, 고개 숙인 금메달리스트 마라토너,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스타디움,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경기가 치뤄졌다. 우승후보로 꼽히던 아르헨티나의 사발라와 처절한 사투를 벌인 손기정이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기록은 2시간 29분 19초, 세계신기록, 당시 인간이 넘을 수 없다고 알려진 마의 2시간 30분대를 허문 대기록이었다. 손기정은 단 한번의 웃음, 그 어떤 세레모니도 보여주지 않고 고개 숙인 채 경기장을 떠났다. 시상대에서도 그러했다. 일본국가인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동안 월계수로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가리려 노력했다. 일제식민지 치하, 나라 잃은 손기정은 일본국적으로 올림픽에 참가했기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고 밝힌바 있다. 당시 그는 올림픽 메달리스트로서 작성한 문서들에 '손기정' 이라 적고 태극기를 그려 조선인임을 분명히 밝혔다. 우승직후 월계관을 쓰고 있는 손기정의 현장 사진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채 신문을 게재한 '일장기 말소사건'이 발생했다. 기자와 삽화가는 고문을 당한 후 구속됐고 신문은 정간됐다. 신사참배, 창씨개명 등 우리민족의 얼과 뿌리를 뽑으려는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했던 때였다. 손기정의 우승 소식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촉매제로 작용했으며, 그는 사그라지던 민족혼을 일깨운 민족의 표상으로 지금도 기억된다.
몇 가지 이야기를 소개한다. 손기정은 17년간 세계 마라톤을 지배했다. 베를린에서 그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준 사람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일장기 말소사건은 그 해 8월 25일 동아일보가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13일에 이미 조선중앙일보가 먼저 보도했다. 조선중앙일보는 그 다음해 재정난의 이후로 폐간됐다. 손기정의 금메달은 일본의 것이다. 그가 일본 국적으로 올림픽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은 지난 2012년 홈페이지 손기정 소개글에 "한국이 일본에 강점되었기 때문에 남승용과 함께 일본 이름으로 출전할 수 밖에 없었다"는 문구를 추가했다.

8월 21일, 1959년 / 하와이 왕조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하와이를 준주에서 주로 승격시키는 법안을 공포했다. 1898년 미국의 속령이 된지 59년만의 일이며 성조기의 별이 50개로 늘어나는 순간이다. 이로써 하와이 왕조는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사실 이미 하와이는 하와이인의 땅이 아니었다. 약 1천년전 이곳에 이주한 폴리네시안인들은 여러 부족을 이루며 살아왔다. 1778년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도착한 뒤 격변이 시작된다. 서양식 총포를 받아들인 카메하메하 1세는 다른 부족을 정복해 왕국의 틀을 다졌다. 불행히도 미국인 선교사와 자본가에 의해 전통은 무너지고 서양에서 건너온 전염병은 인구 절반의 목숨을 앗아간다.
이후 텍사스주 병합과 같은 방식으로 미국의 하와이 병합이 추진됐다. 타국으로 이주한 미국인들이 그 나라의 경제권을 잠식하고 지배구조를 마련한 후 미국에 합병을 요청하는 방식이다.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재배를 위한 대농장이 생겨나고 토지매매가 허용되면서 하와이는 서서히 미국인들의 자본에 의해 잠식된다. 칼라카우아 왕은 일본을 끌어들여 미국인 농장주들을 견제하려 하지만 농장주들의 사주를 받은 민병대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고 왕권을 제한하는 헌법에 서명하게 된다. 1893년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미국인 농장주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지만 미해군이 동원된 쿠데타가 발생하고 무력에 의해 왕권을 포기하게 된다. 농장주들에 의한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이듬해 하와이 공화국이 수립된다. 대통령이 된 '샌퍼드 돌'은 미국에 병합을 요청한다. 샌퍼드 돌 가문은 지금도 거대과일유통회사를 거느리고 하와이를 움직이고 있다. '돌(Dole)' 상표가 붙어있는 파인애플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하와이 왕국의 후손 마릴리니 카하우를 국가 원수로 추대한 '하와이 왕국정부'가 수립되어 하와이 독립운동을 수년째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하와이 당국은 아예 응대조차 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