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역사

6월 4일, 2002년 / 붉은 물결이 역사가 되다 '2002년 월드컵 대한민국 vs 폴란드'

우승골을 넣었던 유상철은 당시 왼쪽 눈이 "실명상태임을 숨긴 채로 출전했다"고 말한다. 첫골의 주인공 황선홍은 "어시시트해준 이을용이 바운스도 헤딩도 직접차기도 안되게 볼을 줘서 순간 미웠다. 그래서 그냥 발을 가져다 댔다"고 말한다. 16년간 A매치 132경기를 뛰고 지난 2010년 은퇴한 이운재는 "94년 첫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었지만, 히딩크 감독의 신임을 얻은 그날이 내 축구인생의 새로운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아직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내 인생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그날 승리가 확정된 그 순간이다"라고 당시 코칭스텝이었던 베어벡 감독은 말한다.
2002년 6월 4일 부산 월드컵 경기장에서 한국과 폴란드의 경기가 열렸다. 그날은 월드컵 본선 4무 10패를 기록하고 있던 한국이 첫승을 얻은 날이며, 4강신화의 시발점이 된 날이다. 전반전 26분 황선홍의 왼발에서 터진 첫골에서 시작된 함성은 후반 9분 유상철의 중거리 슛이 폴란드 골망을 흔들 때 절정에 달했고 관중은 물론 집에서 거리 응원장에서 해외에서 시청하던 모든이들이 '대~한.민.국'을 외치게 만들었다.

붉은악마 서포터즈만이 길바닥에 앉아서 응원을 한다는 인식이 그날 이후 깨졌다. 폴란드를 꺾고 월드컵 출전사상 첫승을 거둔 이후 시민들은 붉은악마 거리응원에 동참했다.

6월 10일 폭우속에서도 서울에서만 45만명, 전국 81개소 66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국내외 언론/방송사의 주목을 끌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14일 포르투칼전 전국 223개소 3백여만명, 18일 311개소 3백5십여만명, 22일 스페인전에서 전국 5백여만명을 기록한 것에 이어 25일 독일전에는 자그마치 6백5십여만명이 거리응원에 나섰다.

세계가 놀랐다. 열정적인 응원에 놀라고 거리거리 쓰레기하나 남기지 않는 시민의식에 또 한번 놀랐다. 당시 프랑스의 르몽드는 "붉은악마는 새로운 응원문화를 창조해 냈다"고 했고 CNN은 "거대하고 열정적이면서 질서정연한 군중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것"이라 보도했다.

4강 경기였던 독일전 응원석에 그려진 "꿈은★이루어진다" 라는 카드섹션은 붉은 물결이 역사가 되었음을 세계에 알린 퍼포먼스로 기억될 것이다.

6월 4일, 1989년 / 천안문 사태(천안문 민주화 운동)

매년 이맘때면 중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의 지식인, 유수의 단체들이 "중국정부는 '전안문 사태'를 재평가해야 한다" 고 한목소리를 낸다. 1989년 6월 4일 중국 정부는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학생들과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해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때 벌어진 유혈참극의 희생자 수는 중국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319명, 유가족모임의 주장에 따르면 최소 3천명이다. 천안문 사태 당시 자녀를 잃은 부모의 모임인 '천안문 어머니'는 희생자 수가10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것은 정부가 의도적으로 수를 줄였고 유혈 진압 후 병원으로 옮긴 중상자 상당수가 끝내 사망했으나 통계에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또한, 근거로서 사건발생 사흘 후 중국홍십자사 대변인이 외국언론에 2천6백이라고 확인한 사실을 들었다.

천안문 사태는 4월15일 호요방 前당총서기가 사망하자 그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이 집회를 갖고 일반시민들이 동참하면서 집회는 민주화 운동으로 발전했다. 온건파인 조자양 총서기, 호계립 정치국 상무위원 측과 강경파인 양상곤 국가주석, 이붕 총리 측이 대립했으나, 강경파가 득세하자 계엄군이 이날 새벽 천안문에서 무기한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과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으며, 군의 발포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매년 천안문 사태 주기가 다가오면, 중국 정부는 천안문사태와 관련한 행사가 벌어질 경우 체제 위협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 대비를 강화해왔다. 천안문 사태 관련 인사들 대부분을 미리 가택연금하고 주요 인사와 단체를 사복경찰이 감시한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홍콩에서는 인권단체들의 주관으로 다양한 집회가 벌어진다.

1989년 직후 중국 지도부는 이 사건을 '반혁명사건'이라고 평가해왔으나, 원자바오는 기자회견 등에서는 '정치적 동란'이라는 비교적 완화된 표현으로 사용했다. 1989년 자오쯔양 총서기는 당시 학생들의 움직임을 "애국운동"이라고 평가한 뒤 실각했으며, 장쩌민 당시 상하이 시당 서기가 중앙당 총서기직에 올랐다.

6월 30일, 1936년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세상에 태어나다

출간 첫해 1백만부가 팔린 이 소설은 다음해인 1937년 저자인 마가렛 미첼에게 퓰리쳐상을 안겨준다. 이후 전 세계적으로 3천만부 이상 팔린 초유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또한, 클라크 케이블과 비비언 리 주연의 동명 영화로 만들어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총 10개 부문의 상을 휩쓸며 불후의 명작이 된다. 당시로서 천문학적인 예산인 6백만 달러가 투입된 이 영화는 1965년 '사운드 오브 뮤직'이 나오기까지 30년간 세계 영화 흥행 수익 1위 자리를 고수했다. 시상식 관련 일화를 소개하자면, 당시 여전히 존재했던 인종차별로 인해 하녀 역으로 열연한 흑인배우 해티 맥대니얼이 시상식장에 참여할 수 없게 되자 클라크 케이블이 자신도 참석하지 않겠다 선언한다. 논란 끝에 결국 둘 다 시상식에 참여 할 수 있었으며, 해티 맥대니얼은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미국의 남북전쟁시대를 그린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의 저자 미첼은 대학 졸업후 남부에서 발행부수가 가장 많았던 '애틀란타 저널'에서 기자로 일을 했으며, 남북전쟁에서 활약한 장군들을 소개하는 기사로 주목을 받았다. 1926년 발목 부상으로 쉬는 동안 남편의 권유를 받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어릴 적 남북전쟁 생존자들에게서 들은 이야기, 취재하면서 만남 사람들의 이야기와 방대한 양의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미첼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결말 부분인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부터 썼는데, 신문사에서 일할 때 결론부터 기사를 쓰는 습관 때문이라 한다. 이 소설이 완성되는데 9년이 걸렸으며 첫 장은 출판 직전에야 완성 되었다고 한다.

맥밀란 출판사 헤롤드 라탐은 애틀란타 출장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첼로부터 원고를 받았다. 큰 기대없이 원고를 읽기 시작한 그는 뉴욕에 기차가 도착한 줄도 모른체 책을 읽었다고 한다. 원고를 전해주고 집으로 돌아온 미첼은 생각이 바뀌어 원고를 돌려달라는 전신을 세차례나 보냈다고 한다. 라탐은 원고대신 수표를 보냈다고 한다.

미첼은 49년 8월 집 근처에서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