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역사

5월 5일, 1921년 / 샤넬의 향기 '샤넬 넘버 5' 시판

역사상 가장 사랑 받은 여배우라 여겨지는 마릴린 먼로는 "오늘 밤 무슨 옷을 입고 잘 거냐?"는 질문에 "샤넬 넘버 5"라 답했다고 한다. 역사상 가장 사랑 받은 향수로 여겨지는 '샤넬 넘버 5'는 1921년 5월 5일 출시됐다. 가브리엘 샤넬은 숫자 '5'가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어왔기에 시판일을 5월 5일로 맞췄다고 한다.
'샤넬 넘버 5'는 꽃향기에 화학물질인 알데히드를 섞어 만든 서민용 향수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향수 중 하나이며, 백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미국의 배우 겸 모델, 가수인 마릴린 먼로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초기 상업적으로 성공한 여러 영화출연 미국의 섹시 심벌 아이콘이 되었다. 이후 공적발언에 관한 책임을 중요시했기에 섹시 심벌 아이콘을 넘어 시대의 아이콘으로까지 자리잡으며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둘은 꽤나 잘 어울린다.
'샤넬 No.5'는 유럽 주둔 미군에 의해 미국으로 퍼져나갔고 샤넬이 사업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세계적 브랜드로 성장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제품이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30초마다 한 개씩 팔리는 인기상품이다. 하지만 본인은 '넘버 1'만 애용했다고 한다.
가브리엘 샤넬은 1883년 매우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적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그녀를 고아원으로 보냈다. 낮에는 보조 양재사, 밤에는 가수로 전전했다. 그녀의 애칭이 '코코'인 것은 이때 즐겨부른 노래 '코코를 아시나요'이기 때문이다. 20대 후반 한 부호의 지원으로 파리에 작은 모자점을 내고 디자이너로서의 걸음을 내디뎠다. 이어 스웨터, 스커트 등을 팔았다. '푸어 걸 룩'(poor girl look)은 단숨에 상류층 여성들의 눈길을 휘어잡았고 단순성과 편안함을 강조한 그녀의 디자인은 패션계에 일대 돌풍을 일으켰다. 그녀의 디자인 혁명은 30년동안 이어졌고 1971년 호텔방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5월 9일, 1986년 / 에베레스트 정상 누가 먼저 밟았는가?

1986년 5월 9일, 텐징이 숨을 거두자 세계최초로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등정에 성공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사실은 텐징이 마지막 몇 걸음을 앞에 두고 내게 영광을 양보했다"
텐징은, 세계 최초로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등정에 성공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함께 1953년 5월 29일 11시 30분 그 곳에 있었다. 그의 7번째 등정시도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힐러리와 원정대의 우두머리였던 헌트 대령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고 텐징에게는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했으며, 영국 정부는 그에게 성 조지 훈장을 수여했다.
텐징 노르가이는 네팔 셰르파족 산악인이다 에베레스트 산 인근 네팔 쿰부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7년에 텐징은 에베레스트 등정에 참가하였으나 실패했다. 1952년에 그는 레이몬드 램버트가 이끄는 스위스 원정대에 참가하였다. 원정대는 남부 네팔쪽에서 에베레스트 산 등정을 시도해 텐징과 램버트는 8,599m의 등정기록을 세웠다. 1953년에 존 헌트의 원정대에 참가해 마침내 에레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인도와 네팔에서 찬사를 받았으며, 그는 부처나 시바의 화신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기자들은 텐징과 힐러리 중 누가 먼저 에베레스트 정상에 발을 딛었는지를 끈질기게 질문했다. 원정대의 우두머리였던 헌트 대령은 "그들은 팀으로서 함께 도착했다"라고 말을 해 의문이 증폭되었다. 힐러리는 텐징이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미국, 영국, 네팔, 인도 국기들을 머리 위로 들고 있는 세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 중 한 장이 인간 의지의 놀라운 순간을 포착한 등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진이 되었다. 재미난 사실은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서 찍은 모든 사진에 텐징 밖에 없다는 것이다. "텐징은 카메라 작동법을 몰랐고 에베레스트 산 정상은 카메라 작동법을 가르칠만한 장소가 아니었다"고 힐러리는 이유를 설명했다. 등정 당시 둘 중 누가 먼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냐는 논란이 일자 셰르파였던 텐징은 이렇게 말했다. "에베레스트 산에 두 번째로 올랐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면, 나는 앞으로 부끄러운 마음으로 살 것이다."

5월 16일, 1770년, 비극의 주인공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결혼하다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살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결혼식이 베르사이유에서 열렸다. 마리는 신성 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의 딸이었고 왕세자 루이는 루이 15세의 손자였다.오랜 숙적 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루이는 4년 후 방년 20세로 왕위에 오른다. 루이 15세가 넘겨준 심각한 재정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데다가 미국 독립전쟁에 참여하는 바람에 파탄지경에 도달하게 되면서 통치가 나날이 어려워졌다. 내성적이고 아직 덜 성숙한데다 자신감마저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따뜻해 신하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한 살 어린 왕비는 도움은커녕 짐이 되었다. 경박하고 무분별하고 방탕한 왕비는 염문과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그녀의 무절제한 궁정비 지출은 프랑스가 막대한 부채를 안는 데 한몫을 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마리는 시간이 갈수록 루이 16세에게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는 왕을 국민들에게서 점점 멀어지게 했다. 프랑스 농민들이 먹을 식량이 없다는 소식에 "그렇다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진위를 의심받기는 하지만 이 전설적인 에피소드는 마리의 행태를 능히 짐작케 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루이 16세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놓치고 만다. '반혁명'의 이름으로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마리 앙투아네트는 10월에 단두대에서 명을 다했다. 5월 16일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권력의 어리석음을 논할때 마다 회자되는 둘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다.

5월 24일, 1844년 / 정보 통신 혁명을 불러온 또 하나의 발명품 '모스 부호'

미국의 발명가 새뮤얼 핀리 브리즈 모스가 미 국회 의사당에서 모스부호로 만들어진 최초의 메시지를 날렸다. 볼티모어의 기차역에 있던 앨프리드 베일은 종이 테이프에 찍힌 메시지를 읽고 바로 모스에게 답장을 보냈다. 아주 단순한 조작, 점과 선으로 부호를 찍으면 전기 회로를 통해 먼 곳의 수신기로 부호가 전달되는 방식이었다. 정보통신 혁명을 위한 또 하나의 핵심 발명품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로서 사람들은 주식 정보, 열차 시간, 각종 뉴스 등을 상상도 못할 정도로 빨리 접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