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역사

1936년 2월 5일 모던 타임스가 개봉하다

모던 타임스는 찰리 채플린의 긴 커리어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는 영화다. 아이러니 하게도 무성 영화 최후의 걸작이라 불리는 모던 타임스는 원래 유성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었다. 세상은 계속 유성 영화로의 변화를 겪는 가운데 무성 영화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던 채플린은 이러한 변화에 거부감을 보였다. 모던 타임스도 처음에는 유성 영화로 제작하자는 계획이 있었으나 채플린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고 결국에는 대사가 거의 없는 무성 영화에 가까운 영화가 되었다. 찰리 채플린이 중간에 노래를 부르는 등 목소리가 등장하는 장면이 있기 때문에 모던 타임즈를 채플린 최초의 유성영화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영화 전체적인 분량으로 생각해 보면 무성 영화에 더욱 가깝다.
모던 타임스는 기본적으로 찰리 채플린 특유의 익살스런 연기를 맘껏 즐길 수 있는 영화지만 날카롭게 사회를 고발하는 시선이 담겨 있기도 하다.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노동자들이 인간이 아닌 기계 부품처럼 취급되는 당시의 사회상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성을 무시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에 채플린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는 논란도 불러왔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냉전의 시대로 들어서자 미국 사회는 맥카시즘 선풍에 휩싸였고 연예계 에서도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를 색출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채플린은 모던 타임스를 제작한 것 등을 이유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결국 시민권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다

한국 최초의 가톨릭 추기경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2009년 2월 16일 노환으로 선종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88세. 그가 남긴 유언은 "서로 사랑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마지막까지도 사람들을 위하여 남긴 말은 크게 회자되었고 그가 묘비에 새긴 사목표어 너희와 모든 이 를 위하여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국민들이 군부 독재 정권으로 신음할 때 민주화의 편에 서서 독재 정권에 당당히 맞섰으며 종교와 신념을 뛰어 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선종 당일과 장례 미사 당일을 제외한 3일의 조문 기간 동안 약 40만 명의 시민들이 명동성당에 줄서서 조문을 하였다. 6월 항쟁 때 거리에 나선 시민들을 숨겨주고 보호해 주던 바로 그 장소, 명동성당에서 치러진 장례였기 때문에 더욱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당시 명동성당에 피신해 있던 시위 학생들을 체포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김수환 추기경은 "수녀들이 나와서 앞에 설 것이고, 그 앞에는 또 신부들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 맨 앞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밟고 신부를 밟고 또 수녀들까지 밟아야 학생들과 만난다"라고 이야기했고 이러한 그의 발언은 두고 두고 회자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선종할 떄 각막을 기증했고 2명의 환자에게 각막이식이 이뤄졌다. 그 영향으로 각막과 장기기증을 하겠다고 서약하는 사람이 폭증하여 관련 기관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고 한다.


1685년 2월 23일 헨델이 출생하다

음악의 어머니로 불리는 독일 출신의 영국 작곡가 헨델이 1685년 2월 23일에 출생했다. 그는 독일 할레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면서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에 관심을 나타냈다. 어릴 때부터 재능이 넘쳤던 그는 어린나이부터 음악을 공부했고 지인들의 도움으로 음악계에 입문하게 된다. 하지만 방탕했던 생활 때문에 빚쟁이들을 피하기 위해서 영국으로 건너 가서 1727년에 아예 귀화했고 지금도 영국 사람들은 헨델을 자국의 음악적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다.
바로크 시대에 대표적인 작곡가로서 많은 활동을 했는데 동갑내기 이며 동시대에 활동 했던 바흐와 많은 비교가 된다. 주로 종교적인 모티브를 사용하여 종교음악을 작곡했던 바흐와는 달리 오페라나 오라토리오 등의 대중음악 작곡에 더욱 더 몰두 했다. 헨델의 작곡 스타일은 바흐보다 더 대중적이었기 때문에 많은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러한 인기 때문에 많은 표절시비를 겪기도 했다.
말년에는 운이 없어서 실명까지 했는데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는 돌팔이 의사의 잘못된 치료 때문이라고 한다. 바흐 또한 같은 의사에서 치료 받고 실명한 기록이 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굴복하지 않고 헨델은 작품활동을 이어갔고 결국 헨델 최고의 명곡이자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하면서 음악활동의 정점을 찍게 된다.
이후 그는 죽어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뉴턴이나 다윈 등 엄청난 업적을 가진 위인만 안장 되는 이 곳에 안장 되면서 영국 최고의 음악가로 자리를 확고히 했음을 알 수 있다.

1991년 2월 27일 조지 부시 대통령이 쿠웨이트 해방과 종전을 선언하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걸프전은 시작 되었다. 페르시아만을 배경으로 해서 벌어진 이 전쟁은 현대의 전쟁은 어떤 모습을 하게 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전쟁이기도 하다. 국제연합은 이러한 이라크의 침공을 즉각 비판했으며 쿠웨이트 주둔이라크군에게 즉각 쿠웨이트에서 철수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라크군이 1철군시한은 15일까지 철군하지 않자 미군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은 1월 17일에 참전했다. 걸프전의 전개과정은 사막의 폭풍 작전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미국은 엄청난 공군력과 미사일을 토대로 아주 손쉽게 이라크 군을 제압해 나갔다. 당초 베트남 전처럼 장기화 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1달을 조금 넘긴 다국적군의 공습은 이미 이라크군을 처참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공중 폭격 위주의 3단계가 끝나고 2월 24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지상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미군은 엄청난 기세로 작전을 수행해 나갔다.
결국 2월 27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가 쿠웨이트 해방과 걸프전의 종전을 선언했다. 전쟁의 결과는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이라크군은 확인된 사망자만 2만 여명이 넘고 사상자는 10만 명에 가까운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단 294명 만 전사했다. 그나마 그 중 145명은 사고사이고 전투 희생 중에서도 35명은 오인 사격에 의한 것. 이를 통해서 미국은 전세계의 패권을 더욱 더 공고히 했고 이라크는 강력한 경제제재 조치를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