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역사

1913년 12월 1일 포드에서 처음으로 일괄 조립 라인을 도입하다

포드는 1903년에 헨리 포드에 의해서 설립된 자동차 회사다. 처음 시작은 디트로이트 시의 작은 공장이었다. 하루에 몇대의 자동차 만을 생산하는 소규모였다. 이런 포드가 전기를 마련한 것은 모델T를 생산하면서 모델T가 기록적인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공장 또한 대규모가 되었다. T모델은 825달러라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팔려나갔다. 1914년에만 50만대 이상의 모델T가 팔리면서 미국 전체 자동차의 반 이상이 포드 자동차일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포드를 다른 자동차 회사와 다르게 만든 것은 일괄 조립 라인 이른바 컨베이어 벨트의 도입이었다.
컨베이어 벨트의 원리는 비교적 간단하지만 생산성에 혁신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자동차는 벨트를 따라 이동하게 되고 작업자는 단순한 반복 작업으로 부품을 장착하게 된다. 낮은 비용으로도 높은 품질관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거의 모든 자동차 회사들이 이러한 생산방식을 따르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제조기업들도 이 공정을 채택하고 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기반으로 하는 현대 사회는 컨베이어 벨트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드는 현재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동차 회사로서 명성이 드높다. 포드는 다양한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여 운영한 바 있다. 애스턴 마틴, 재규어, 랜드 로버 등이 포드의 자회사였던 적이 있다. 현재는 애스턴 마틴, 랜드 로버 등을 모두 다른 회사에서 매각한 상태다. 일본 마쓰다 자동차의 지분 33.4%를 소유하고 있기도 했지만 현재는 주식을 매각해서 13.4%의 지분만 보유하고 있는 상태다. 포드는 자사의 브랜드로 링컨을 보유 중이다.

1791년 12월 15일 미국 헌법의 첫 수정 조항인 권리 장전이 발효되다

우리에게는 권리 장전으로 더욱 잘 알려진 미국 헌법의 첫 수정조항이 발효된 날이 1791년 12월 15일이었다. 권리장전은 제임스 메디슨이 주도하여서 작성을 했다. 물론 이른바 파운딩 파더라고 불리는 건국의 아버지들 또한 작성에 참여를 했다. 이러한 수정 조항은 개인의 권리가 보다 명확하게 명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정치가들에 의해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버지니아 권리선언을 기초했던 조지 메이슨 또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메이슨은 헌법제정회의에 참석해서 헌법이 개인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승인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버지니아 주의 헌법 비준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메사추세츠 주 또한 마찬가지여서 개인의 권리에 대한 구체적인 보장 내용을 덧붙이는 조건으로 헌법을 비준했다. 의회가 소집될 떄에 이러한 수정 조항 채택에 대해 찬성하는 분위기는 압도적이었다.
이러한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권리 장전은 개인의 권리에 대해서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흔히 권리 장전을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법이라고 부르는데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권리 장전의 1조는 국교를 금지하고 있고 종교의 자유와 언론 출판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법문 중에 하나기도 하다.

1999년 12월 20일 포르투갈이 중국에 마카오의 영유권을 반환하다

마카오는 명나라 시대에서부터 포르투갈과 역사가 깊은 곳이었다. 중국 수출입 거점이었으며 포르투갈 상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곳이었다. 1553년에 포르투갈은 명나라 관리에게 뇌물을 주면서 이 곳에서 체류하기 시작했고 1672년부터는 명나라 조정도 이를 공식적으로 허가했다. 이후 프로투갈인들은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이 곳을 식민통치 하기 시작했다.
독특한 것은 비슷한 역사를 거친 홍콩과는 달리 포르투갈은 꾸준히 이 곳을 반환하려 했다는 것이다.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국경으로 몰려오기도 했는데 포르투갈은 이를 힘겹게 방어했다. 포르투갈 정부에서는 중국에세 반환하려 했으나 중국 공산당 정부는 마카오를 통해 통상을 하려고 이를 거부했다.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이후 모든 식민지를 포기하기로 한 포르투갈 정부가 다시 한 번 반환하려 했지만 중국은 이를 다시 거부했다. 1984년 홍콩 반환조약이 체결 되고 난 이후 포르투갈 정부는 다시 반환 의사를 표명했고 중국은 드디어 이를 받아들였다.
현재 마카오는 옛날과 같이 통상거점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상실한 상태지만 카지노 도시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라스 베가스에 호텔을 가지고 있는 미국 기업들이 앞다투어 이 곳에 투자를 하면서 동양의 라스 베가스라는 별명도 붙었다. 중국에 반환된 이후에 중국인들의 카지노 수요가 이 곳으로 몰리면서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했고 2006년에는 라스 베가스의 매출을 제치기도 했다.

1971년 12월 25일 대연각호텔 화재 사고가 발생하다

1971년 서울 충무로동에 있던 대연각 호텔에서 화제 사고가 났다. 대한민국 최악의 화제사고이자 세계 최대의 화재 사고로 꼽히고 있다. 사건 당일은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에 호텔에 수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오전 9시 50분 경 1층 커피숍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원인은 가스 폭발이었다. 불길이 시작되자마자 계단을 막아버려서 사람들은 아래로 내려오지 못했고 한시간 반만에 건물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불이 이렇게 빠르게 번진 이유는 빌딩의 내장재가 온통 잘 타는 물질이었기 때문이다. 인테리어는 목재가 많이 사용되었으며 벽은 한지로 되어 있었다. 고층에 있던 사람들은 탈출을 하지 못해 창가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1000여 명에 가까운 사람이 화재진압에 동원되었지만 화재를 잡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완전 진압에는 무려 7시간이나 소요되면서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사망자는 166명에 달했고 구조를 기다리다가 무작정 뛰어내려 추락사한 사람만 38명에 달했다. 부상자 또한 68명 이었으며 행방불명 된 사람도 25명이나 됐다. 21층의 고층 호텔에서 화재가 나는 광경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서 생중계 되었고 이 영상은 전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할리우드의 고전 명작 중 하나인 영화 타워링은 이 사건에 모티브를 얻어서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