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역사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 도착한 광주발 통학열차에서 일어났던 일이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일본인 중학생들은 광주여자보통학교 여학생 세명, 박기옥, 성금자, 이광춘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을 하였고 이 광경을 본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는 분노하여 항의했으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난투극으로 이어졌다. 일본인 학생 50여 명과 한국인 학생 30여 명이 맞붙는 와중에 일본경찰들은 일본인 학생 편을 들었다. 한국인 학생들은 집단 항의했고 한국인 학생들의 울분을 이를 계기로 폭발게 됬다.
11월 3일은 일본의 메이지 천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치절이었지만 음력으로 10월 3일 즉 개천절이기도 했다. 학생들은 일본 국가를 불러야함에도 침묵했고 하교길에서부터 단체행동에 나섰다. 전에 있었던 충돌을 불공정하게 보도한 광주일보를 찾아가 항의를 하고 가두시위를 시작하였다. 광주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적을 물리치자는 내용의 행진가를 불렀다. 일제는 항의시위를 가담한 70여 명의 한국인 학생 중 60여 명을 구속하였다.
첫 번째 그들의 시위는 이렇게 끝났지만 일제의 탄압은 오히려 학생들의 저항정신에 불을 집혔다. 11월 12일에는 1000장의 유인물이 배포되었고 광주보고는 물론 광주농고,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여학생들도 가담하여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동맹휴학까지 포함된 시위였다. 일제는 250여 명에 가까운 학생들을 검거했고 학생 시위에 배후에 있다고 지목된 사회운동 단체 간부들도 검거했다. 광주학생 항일운동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전국적 항일 운동의 단초가 되었다.

1821년 11월 11일 도스토예프스키가 태어나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1월 11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그는 7남매 중의 차남이었다.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당시 러시아에서 의사는 중인계급 정도로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3살 때 기숙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했다. 이후에는 공병학교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았지만 예민하고 병약했던 그에게 군사교육은 맞지 않았다.
이 시기 그는 문학에 빠져들어서 친구들과 습작을 평가하고 논쟁을 벌이는 것을 즐겼다. 공병학교를 졸업하고서는 임관을 했지만 문학에 전념하기 위해서 3년 만에 전역했다.
그는 첫 작품인 가난한 사람들로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하면서 전업작가의 길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 작품들이 혹평을 받으면서 힘든일이 연속되었다. 그는 사회주의를 선봉하는 급진적 정치 모임에 참여했는데 당시 황제 니콜라이 1세가 통치하고 있던 러시아에서는 이는 엄격하게 금지된 일이었고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다.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 형 집행이 중지되고 시베리아에 유형을 가게 되었다. 그는 이 곳에서 10년을 보내면서 민중들의 삶을 체험했고 시베리아에서의 생활은 작품세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치게 되고 1866년 걸작 죄와벌을 완성하였다. 이후에도 백치, 악령 등의 작품을 쏟아냈다. 재미있는 것은 시베리아 유배 시절 악화된 지병 간질과 도박이 창작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 그의 작품 속에 간질과 도박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도박 때문에 그는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고 빚을 갚기 위해 출판사와 무리한 계약을 하여 마감에 쫓기기 일수였다. 그는 1881년 폐동맥 파열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2002년 11월 16일 사스의 첫 발병 사례가 발견되다

사스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을 일컫는다. 약 10퍼센트의 치사율을 보이는 질병으로 일반적인 호흡기 질환보다 훨씬 높아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사스의 원인은 사스 바이러스인데 보통 잠복기가 2~7일 정도 된다. 사스의 감염이 의심되는 경우는 38도 이상의 발열 증상이 있고 최근 10일 내에 사스로 진단 받은 사람과 접촉한 적이 있거나 세계보건기구에서 지정한 사스가 발생한 국가로 여행을 다녀온 경우다.
2002년 11월 16일 중국 광둥성에서 사스의 첫 발병 사례가 발견되었는데 이 떄까지만 해도 환자는 단순 독감 환자로 치부되었다. 광둥성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2003년 7월까지 8400여 명의 환자가 발생하였다. 사망률은 10.9%에 달했다. 노인 환자들의 사망률은 50%를 넘었다고 알려졌다. 본격적으로 사스가 알려진 것은 홍콩의 미국인 사업가가 사망했던 2003년 3월 중순. 그를 치료한 중국, 베트남, 홍콩 병원 의료진도 차례로 감염되어서 이후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대기를 통해 전염되기 때문에 몇 주 만에 37개국으로 퍼져나가서 전 세계를 공포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한국에선 총 3명의 감염자가 나왔다.
중국, 홍콩, 대만 등 사스 환자들이 많이 나온 국가들에서는 대중교통 이용이나 외출 등의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리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마스크나 손세정제와 같은 개인 위생용품 판매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역학조사결과에 따르면 사스 바이러스의 근원은 광둥성에서 식용으로 쓰는 사향고양이었다고 한다. 야생의 사향고양이를 잡아서 시장에 내다 파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전이된 것으로 밝혀졌다. 다행히 2003년 이후 사스 환자수는 급감했다.

1986년 11월 21일 이란-콘트라 스캔들이 밝혀지다

이란-콘트라 스캔들은 미국의 레이건 정부가 이란에 대해서 무기를 불법적으로 판매하고 그 이익으로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지원한 정치 스캔들이다. 그 동안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이란을 적성국가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무기 판매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콘트라 반군에 대한 지원은 당시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처음 이 스캔들이 알려진 것은 레바논 신문의 보도를 통해서 였다. 미국은 납치된 인질의 석방 대가로 이란에 무기를 공급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최초 보도가 된 시점은 1986년 11월 3일이었고 이란 정부는 이 보도를 인정하였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11월 13일 인터뷰를 통해서 이란에 대한 무기 판매를 인정하였지만 인질 석방의 대가라는 점은 부인했지만 이후 11월 21일 미 해병대 장교였던 올리버 노스가 사건의 전모를 인정했고 결국 레이건은 탄핵의 위기에 몰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레이건의 인기는 크게 떨어졌다. 심지어는 탄핵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왔다. 레이건 정치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미 의회는 특별검사로 로렌스 월시를 임명하여서 사건을 수사하였고 1988년 올리버 노스를 포함한 핵심 인물들이 기소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하였다. 미국 정부는 정보 공개 거부 및 문서 파기 등 조직적인 은폐를 했고 사건이 완벽하게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1992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버지 부시는 관련자 모두를 사면하였다. 이 때문에 부시는 비판에 직면했는데 그가 레이건 정부의 부통령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