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연의 그림과 함께하는 수필 - 가을에 전하는 안부

옛날을 돌아보며 후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을 싫어한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굳이 마음 땅속 깊은 곳에 묻혀있는 것을 꺼내어 다시 고치고 부수는 일들이 부질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지금도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세월이 많이 흐르고 더없이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만나지 못하여도, 예전을 되돌아보며 그리워하고 미소 지으며 행복해한다.

오랫동안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 하며 먼 곳에 살고 있는 그녀가, 몇년 만에 소식을 묻는 문자를 꽤 늦은 토요일 밤에 보내왔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 그녀는 지금 무척 외롭고 누군가가 많이 그립다는 것이었다. 나와는 비즈니스로 만나 서로를 알아보며 가까워졌고 또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다정함은 잊지 않고 있으며, 무엇보다 내게 달려와 준 것이 신기하고 고마웠다. 반가운 마음과 설레임으로 열어 보니, 다른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잘 지내?"라는 짧은 안부가 괜스레 아프고 연민이 가는 것이, 아마 토요일이라는 느슨함과 까만 밤이 주는 묘한 뉘앙스 때문일 것이다. 그녀에게 정호승 시인의 "사람은 다 외롭다. 외로우니깐 사람인 것이다." 라 보냈더니 그녀는 "사랑하다 죽어버려라…"고 답을 했다. 갑작스러운 다른 사람의 외로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달래며 잠들게 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좋은 글이에요…견뎌야죠" 하면서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느닷없이 왔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며칠 동안 내내 그녀 생각을 하며 지냈다. 다시 햇살 밝은 날에 전화를 할까 망설이다, 무얼 하려는 것보다는 그냥 지나가는 옛날로 만들어지는 것이 제일 나은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하나의 관계는 설명 하나 없이도 길게 이어간다. 나와 그녀의 기억 속에 한동안 머무르다, 또 다른 가을 늦은 밤 문득 서럽게 외로워지면 서로를 찾아내어 지나가듯 짧게 마음을 열어 놓을 것이다. 내어놓지 못하고 덮어놓은 무거운 장독간의 뚜껑처럼, 한 번쯤은 그것을 열어 진한 햇빛으로 말려주어야만 밑에 있는 무언가는 더없이 잘 익어갈 것이며 깊어질 거라 믿어본다.

이제 다시 시(詩)가 고픈 가을이다.

내 마음도 잘 모르면서 다른 이의 깊은 마음의 진한 시를 이해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전해온 잊지 않는 마음을 받아들이면서, 다 늦은 가을의 외로운 이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